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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이든 양분 -


저자 : 마이클 아이건
출판사 : 한국심리치료연구소
출판일 : 2009 년 04 월 01 일
페이지수 : 357
판형 : A5
정가 : 23000 원  → 20700 원 (10 %↓)
전화번호 : 02-730-2537
재고량 : 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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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 -

마이클 아이건 박사는 사랑이 독을 가지고 있을 때, 부모는 아이에게 무한한 양의 부정적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 있다고 말한다. 부모의 억압된 에너지가 아이게게 흘러들어가 좋음과 나쁨을 구별할 수 없는 혼합물을 형성하게 된다. 아이건 박사는 여러 사례를 통해 환자가 독이든 부모의 영양분을 소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 목차 -

목차

서문 7

1장 독이 든 양분 19

2장 자살 38

3장 유산 72

4장 벌레 없는 세상 104

5장 정상적이라는 느낌 146

6장 무의식적인 깨달음 182

7장 자기-무화(Self-nulling) 201

8장 공허하고 폭력적인 양분 224

9장 고통 X의 그림자 254

10장 방음처리 된 정신과 광증에 대한 두려움 273

11장 길을 찾기 296

12장 욕망과 양분 324

에필로그 354

참고문헌 356 

 
 

- 초록 -


「 독이든 양분 」

Toxic Nourishment     

마이클 아이건 지음
이재훈 옮김



1장

독이 든 양분

정서적인 독과 정서적인 양분은 종종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섞여있다. 설령 이 두 요소를 구분할 수 있다 해도, 둘 중 하나를 배제하고 흡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서적인 양분을 흡수하려면 정서적인 독소도 함께 흡수할 수밖에 없다.
만족하지 못하는 삶에서 상당한 양의 독소에 적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정작 오염되지 않은 양분을 흡수할 기회들이 있어도, 그 기회를 피하는 반응양식을 발달시킨다. 상당한 양의 정서적인 독소가 없다면 삶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적인 독소가 섞이지 않은 양분을 아예 흡수하지 못한다.

앨리스

앨리스는 자기 증오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부모는 스스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서로를 증오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증오가 냉담하거나 싸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증오에는 사랑이 섞여있었다.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착한 딸이 되려고 애썼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그녀는 자신이 집안의 희생양이라는 자각을 갖기 시작했다. 앨리스의 눈에는 그녀의 오빠가 가족의 모든 지원과 관심을 독차지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가족의 이상화 대상으로 비추어지기까지 했다. 앨리스의 오빠는 잘못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가족 내에서 앞으로 성공할 사람으로, 큰 일 할 사람으로, 그리고 가족의 구원자가 될 존재로 대접받는 가족의 영웅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가족을 영광되게 해줄 사람이었다.
앨리스는 신데렐라보다 더 비참했다. 그녀는 잿더미를 뒤집어쓴 공주님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녀를 찾아 구애하는 왕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한 결 같이 형편없어 보이는 남자들만이 그녀를 쫓아다녔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었다. 앨리스는 이성관계의 실패를 자신의 무가치함을 확인해주는 증거로 간주했다. 특별히 어느 시기부터라고 집어낼 수도 없고 분명한 이유도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그녀 자신이 무가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앨리스는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부모가 그녀에게 분별없이 쏟아 부었던 끝 모르는 무가치함과 연결시켰다.
실제로 앨리스는 자신을 가족의 쓰레기 처리장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기분 내키는 대로 앨리스를 대했다. 어머니는 그녀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마땅치 않아했다. 앨리스가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일을 성취할 때마다 어머니는 그것에 대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 인양 반응했다. 앨리스가 성공해낸 일은 모두 어쩌다 운이 좋아 일어난 일이며 이상한 일로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앨리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딸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대수롭지 않은 집안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앨리스에게 늘 경멸과 조롱으로 일관된 잔소리를 퍼부었고,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앨리스는 그런 어머니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어머니에게 앨리스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딸이었다.
앨리스는 아버지에게 사랑받는다고 느꼈지만, 아버지는 너무 약해서 앨리스를 지원해주지 못했다. 하루의 일을 마치면 아버지는 지칠 대로 지쳐 앨리스에게서 위안을 찾았다. 그래도 아버지의 무력함에는 앨리스를 배려하는 따뜻함이 있었고, 앨리스는 아버지의 사랑을 양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고, 그래서 죄책감을 느꼈다. 아버지의 시선이 앨리스에게 향할 때면 그녀는 자신의 존재로 인한 아버지의 깊은, 드러나지 않는 기쁨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쁨은 거의 죽어있는 무기력한 감정이었다. 기본적으로 앨리스의 아버지는 인생에 낙담하고 분노하면서 자기연민에 빠져있었고,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구해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우울증에 이끌리면서도 아버지의 우울증에 함몰될까봐 두려웠다. 억압된 아버지의 따뜻함에서 흡수한 양분은 우울증적 분노와 자기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앨리스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수없이 좌절하기도 했지만 끈질기게 노력해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심리치료사가 되었다. 수년 동안 앨리스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것을 힘들어했다. 언제나 어머니의 집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어머니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인생을 살려고 하면, 언제나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어머니는 앨리스를 끌어들이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정말로 앨리스와 함께 지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앨리스 내면에 어머니에게 끌려가는 역동이 있었던 것일까? 앨리스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앨리스를 심리적인 쓰레기통으로 사용했다. 그녀는 앨리스를 자신의 자기 증오 더미에 묻어버렸고, 앨리스라는 실재하는 존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면서 앨리스가 하거나 하지 않은 모든 일을 핑계 삼아 언제나 앨리스를 변변치 않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앨리스는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다시 어머니를 떠났다. 그리고 혼자 생활하다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다시 어머니에게 이끌리는 역동이 작동했다. 그렇게 될 때마다 증오하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마음은 어머니에게 이끌리는 역동에 완전히 압도될 때까지 팽팽하게 맞섰다.
그것은 마치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급 받는 것과 같았다. 앨리스는 독이 든 양분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 결과, 앨리스는 무관심과 경멸을 공급해줄 어머니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앨리스는 독이 든 양분에 인이 박혔다. 그것이 앨리스가 성장해온(혹은 그녀를 성장하지 못하게 한) 정서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은 마치 간질환자가 임박한 발작의 전조를 느끼지만 정작 그 발작을 멈추게 할 방법은 없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앨리스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충전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공허감으로 인해 살아 있다는 현실적인 느낌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일까?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에 더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생기 있고 좀 더 분명한 정체감이 느껴질 때마다, 앨리스는 삶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해체해야 할 압력에 의해 언제나 무너졌다. 앨리스에게는 삶으로 향하는 몸짓을 지원할 역량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았고, 도움을 받아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독성이 덜한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폐기종을 앓았던 한 철학교수가 생각난다. 오랜 세월 동안 뉴욕에서만 교수생활을 하던 그는 은퇴한 첫 학기에 스위스에 가서 강의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스위스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나는 오랫동안 독소에 적응했던 폐가 신선한 공기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짐작했다.
앨리스의 심리적 허파는 다량의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익숙해진 것들보다 더 많은 생명 지향적인 삶을 사는 데서 오는 긴장으로 인해 앨리스는 붕괴했다. 순진하게도 처음에 나는 독립생활을 이루려는 앨리스의 시도를 고무했다. 나는 역류에 맞서는 앨리스를 지지하려고 애썼다. 이런 시도는 잠시 효과가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생활 초기에 앨리스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실제로 어머니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견딜 수 없는 냄새였다. 그녀가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고 어린 시절의 공포에서 막 벗어나려고 하면 앨리스의 감각기관이 계책을 부렸다. 앨리스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그 시점, 그 장소에서 언제나 어머니의 냄새를 “환각으로” 맡았다. 그녀의 호흡기관은 익숙한 것 즉, 어머니에게 사로잡힌 공기를 만들어냈다.
처음 만났을 때 앨리스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이십대 후반에 접어든 그녀는 거식증 경향이 있어 삐쩍 마른 데다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앨리스는 만성적으로 주눅들어있는 것 같았고,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풍(연속되는 실망, 실패, 거절)이 불기라도 하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보였다. 그러나 앨리스는 은근히 끈질긴 면이 있었고 놀라울 정도로 강인했다. 그녀의 삶에 일관되게 흐르는 요소는 붕괴에 직면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순수한 의지였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 회 만났다.
앨리스에게는 친구들이 있었다. 분석관계 초기에 앨리스는 친구들과 격론을 벌이면서 싸웠다. 앨리스와 친구들은 언제나 서로에 대해 실망하고 서로를 공격했다. 앨리스의 인간관계에는 신랄함이 과도하게 배어있었다. 앨리스는 많은 시간을 혼자 지냈지만(그녀는 항상 혼자라고 느꼈다), 또한 상당한 시간을 친구들을 만나는 데 썼다.
특별히 한 친구는 많은 시간을 붙어 다니며 앨리스를 괴롭혔다. 이 “친구”는 앨리스에게 전제적인 힘을 행사했다. 그 친구는 앨리스가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앨리스가 아무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도 그녀는 더 많이 원했다. 앨리스가 조금이라도 자기 의지를 보이기라도 하면 격노하며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어댔다. 그 친구는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앨리스 탓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도 앨리스는 그녀를 계속 만났다. 잠시라도 만남을 중단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앨리스는 분명히 파괴되지 않고 전혀 영향 받지 않는 자기의 한 조각, 그저 이를 악물고 할 말을 참는 하나의 응축된 점으로 수축되어있었다. 앨리스와 그 친구는 서로를 말로 물어뜯으면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나는 두 사람 각자를 상대방을 유혹하는 독이 든 사과로 상상했다. 그들은 서로를 물어뜯었다. 양분을 주듯 서로에게 독을 주입했다. 그리고 그 독은 두 사람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시간이 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서로에 대한 신랄함은 악의와 독설로 변했다. 앨리스의 친구는 앨리스의 요새화된 태도를 무너뜨리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상처와 무력감에 대한 내용을 매주 거듭해서 소상하게 듣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명백하게 앨리스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어머니와 가졌던 것과 유사한 관계를 재구성했는데, 그것은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요소를 무시하는 관계였다.
그 동안에 나는 앨리스의 고통을 담아주고 있었다. 그때 앨리스는 그녀 자신-앨리스가 된 나-에게 고통을 집어넣음으로써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 어머니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깊은 수준에서, 앨리스가 마침내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알아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앨리스의 고통에 무감각했고, 뿐만 아니라 앨리스의 고통을 양분으로 섭취하고 있었다. 초기단계의 작업에서 나는 붕괴하지 않고, 혹은 그녀로 인해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 앨리스의 고통에 공감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훨씬 더 많이 상호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앨리스는 그 친구(그리고 마침내 나)와의 관계에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보다 훨씬 더 쉽게 반격할 수 있었다. 앨리스가 무엇을 하든 어머니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심한 말로 어머니를 되받아쳐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어머니에 관한 한, 앨리스는 어떤 힘도, 영향도, 효과도 발휘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눈에는 앨리스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혹은 앨리스를 어머니자신의 적개심과 감정의 쓰레기들을 쏟아 붓는 표적으로만 보는 것 같았다. 앨리스의 어머니는 시종일관 변함없이 딸에게 무감각했다. 앨리스는 그 친구를 간접적으로 그녀가 싸우고 있던 어머니로 느꼈다. 앨리스가 그 친구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 친구는 앨리스가 앨리스 자신을 보호하려고 할 때마다 지독한 격노로 반응했다. 사람은 종종 가족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친구에게 전치시킨다.
결국 그 친구는―앨리스의 어머니가 그때까지 그렇게 했듯―앨리스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수개월 동안 쉴 틈 없이 두드려대자 기어코 방어벽이 무너졌고, 앨리스는 내가 그녀를 보호하려고 내 안에 담아두었던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친구와의 관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앨리스는 그 친구를 드문드문 만나더니 마침내 아예 만나지 않게 되었다. 앨리스가 뒤로 약간 물러서자 그 친구는 앨리스와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린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앨리스는 그 친구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앨리스는 죄책감으로 자기비난에 빠져들었다. 앨리스가 뒤로 물러섰기 때문에 그 친구는 미쳐버린 것일까? 앨리스가 그 친구를 더 필요로 했다기보다 그 친구가 앨리스를 훨씬 더 필요로 했던 것은 자명했다. 흔히 그렇듯 관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보다 더 병리적으로 판명된다.
앨리스를 붕괴시키려던 끝에 그 친구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앨리스에게 매우 극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친구는 해체되었는데, 앨리스는 무엇 때문에 살아남은 것일까? 앨리스는 쉴 새 없는 폭격에서 살아남는 것에 익숙했다. 추락한 친구를 보는 것은 끔찍했다. 그 친구는 이 약 저 약, 이 의사 저 의사를 전전하며 추락해갔다.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친구는 앨리스보다 훨씬 포부가 크고 완벽을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친구의 부모는 부유했으며 딸에게 대단한 것들을 기대했다. 그들은 딸의 내적 자원의 한계 훨씬 너머까지 딸을 몰아댔다. 결국 그 친구는 앨리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태로 붕괴되었다. 친구는 완전히 부모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친구의 부모는 딸이 원하는 의사를 볼 수 있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딸의 의사는 물론 치료과정에 이르기까지 딸의 인생을 좌지우지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앨리스는 삶에서 처음으로 놀라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앨리스에게는 그 친구보다 행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 친구의 부모가 딸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원했던 것에 비해 앨리스의 부모는 앨리스에게 원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앨리스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앨리스가 치료받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앨리스의 삶에 대한 부모의 전적인 관심부재가 오히려 앨리스에게는 은총이었던 것일까? 최소한 앨리스의 부모는 그녀가 심리치료사로 누구를 선택하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 앨리스가 무엇을 하든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기에 앨리스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는 나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이전에 여러 치료사와 작업했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앨리스가 나를 만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치료사는 그녀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그가 그녀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중에도 전화통화를 하는 등, 그녀를 개의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앨리스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그의 행동을 목격하면서도 계속 그를 만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어쩌면 앨리스는 어떤 심리치료사와 작업하더라도 부모에게서 받은 나쁜 감정들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앨리스는 함께 작업하는 심리치료사가 자신에게 내보이는 부족한 인내심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그와의 치료를 종결했다.
앨리스는 나에게서도 수없이 떠나려고 했다. 한 번은 집단치료에서 중대한 위기가 발생했다. 당시 앨리스는 나에게 이 년 정도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은 개인치료에, 또 한 번은 집단치료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앨리스는 내가 둔감하다고 나에게 격노를 터뜨리며 치료과정을 떠나려고 했다. 집단치료 구성원들이 떠나려는 앨리스를 말리는 심리적인 완화장치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그녀를 달래주는 동시에, 그녀가 생각하는 정도로 내가 무심한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나의 결점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이유로 그녀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두고 보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나의 결점으로 인해 그녀가 획득할 수 있는 소중한 것을 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격노하고, 치료를 떠나려고 시도했지만, 치료를 그만두지 않았던 일련의 사건들이 그녀의 치료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멸절적이지 않은 힘든 관계를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앨리스는 우리 관계가 곤두박질치거나, 끔찍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우리의 결점들이 정말로 더 크고 효과적인 관계의 구성요소로서 작용했을까?
결국 치료집단은 종결되었고 앨리스와 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치료집단의 지원 없이 일대일 관계의 강도를 견뎌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앨리스의 분노는 다시 폭발했다. 그녀는 격분하면서 치료실의 소품들을 부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치료 중에 뛰쳐나가려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를 치면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던 기억이 난다.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녀가 정말로 힘이 셌다는 것이다. 그녀의 팔을 잡았을 때 나는 솟구치는 그녀의 힘과 그녀의 피부에서 전해지는 성적인 느낌에 정말 놀랐다. 겉으로는 연약해보였지만 그녀의 팔을 잡았을 때 피부로 전달되는 느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류가 내 전신을 통과해간 느낌이었다.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앨리스는 고압전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