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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관조적 자리를 위한 제언
이      름 :
  민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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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화일 : 21세기 종교와 무의식 -블랙 3장.hwp (93184 Bytes) 21세기 종교와 무의식 -블랙 3장.hwp (93184 Bytes)

The case for a contemplative position
(관조적 자리를 위한 제언)
David M.Black
번역: 민규선


서론

종교와 정신분석사이에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두 가지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우리가 종교와 과학 두 영역을 통일성이 있는 우주의 일부분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무엇보다 중요한 어떤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초월’ 이라는 개념은 종교와 과학적 사고를 구별 지워주는 데에 가장 중심적이다.


예배, 제의, 교리, 집단의 멤버쉽, 윤리적 가치등 종교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정신분석이 인지하는 정서적 세계와 비슷한 점들을 갖게 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프로이드가 주도하였듯이, 정신분석이 전 영역의 탈취를 꾸미며, 종교는 환상, 우리의 소망들, 그리고 두려움을 천국이라는 곳에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타자의 죽음(영생을 믿으면서)을 두려워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의 악함과(우리가 제의를 행하거나 규칙들을 지킬 때의 우리의 선함을 믿음으로써), 존재의 무의미함(모든 영혼은 무한히 신앞에서 소중하다) 등등에 관련하여, 종교로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우리는 지옥의 불길을 묘사하여 아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 규칙을 지키게 할 수 있다. 다소 곡해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Joyce 의 <어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저주에 관한 위대한 설교로서의 심리학적 걸작품이다.
이런 종류의 접근은 정신분석에서는 아주 친숙하며 아주 단호하게 종교를 심리학에 종속시키려 한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는 환상으로 가득 찬 분야일 뿐일 반면, 종교 우위의 관점은 정신분석을 이미 종교는 초월한 세속적인 영역에서 실행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두 분야 모두 우위를 점하는 관점을 제공하고자 열망하기 때문에, 이렇게 종교를 심리학에 종속시키려는 소망 속에는 이미 종교나 심리학 둘 다를 각 각 말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비록 선불교에서 중생심과 보리심사이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 주장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여정이 필요하였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의 동기와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 중생의 동기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초월’ 개념은 종교와 과학적 사고를 구별 지워주는 데에 중심적이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초월’이란 주관적인 선호의 문제뿐 아니라 ‘실재’에 있어서도, 어떤 하나의 가치가 다른 것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정도만을 의미하고자 한다. 어떤 관점에서 그러한 실재를 평가할 수 있는가? 보통의 물질주의적 관점을 지닌 과학자들은 양자 물리학의 영역, 곤충 세계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타고난 본능의 정확성, 인간도 저지를 수 있는 가공할 비합리적인 잔인함과 파괴성 등등과 같은 비범한 것들을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다 모아서 단 하나의 세계라는 조합물을 날조 할 수 있다. (비록 고전 물리학과 양자역학사이의 비연속성이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엄청난 근심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주관성을 넘어선 가치-체계를 담은 사상과 궁극적으로 진화가 이루어 내는 현실적인 정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물질주의적 과학자들이 ‘초월’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들을 뒤따르는 무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그 무능력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한다. 양자 입자들이든지, 곤충들이든지, 테러리스트의 행동들이든지 혹은, 진짜, 종교적 경험으로 만드는 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뇌의 전기화학적 활동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보존 원칙으로부터, 초월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무능력이 나오게 되지만,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 과학적 사고과정은 필요하다. 과학적 사고는 경험을 인식하는 피할 수 없는 측면이고 또 그 과정을 지나쳐 갈 수는 없다. 물질주의적 과학자들도 이런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는 신비적인 합일, 불교도의 깨달음, 신적 계시,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혹은 압도될 정도로 설득력이 있는 것들이 존재하고, 뇌에서 일어나는 어떤 종류의 사건들과 주관적으로 상호 관련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뇌 사건이 다른 종류의 뇌 사건에 비해 우월하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장에서 최근의 정신분석과 신경과학적 이해 간에 폭넓게 이루어진 합의들을 무시하지 않고 ‘초월’이라는 사상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을 탐색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사고에서의 ‘의미’와는 다른 것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최근의 심리학적 이해에만 종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고 양식간의 논쟁은, 만약 한 분야가 다른 분야에 조금이라도 적응하지 않는다면 해결되지 못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내가 존중하는 굴드나 다른 사람들이 채택한 다른 입장과 나의 입장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들은 과학과 종교는 결코 중복되지 않는 인간사고의 두 영역이며 둘 다 권위가 있고 필수적이지만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없고 서로 지지하지도 모순될 수 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접근은 이와 대조된다. 하나의 통일성이 있는 우주의 부분으로 두 영역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무엇보다 중요한 어떤 상황이 있다. 나는 우리가 의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 관한 실험을 제안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대화가 의식에 미치는 영향

인간의 경험이 언어에 의해 아주 강하게 구조화되는 사실의 결과는 무엇인가?
--인간은 다양한 의식의 단계를(등급을) 갖고 있다.
--정신분석적 작업이 분석가의 이해와 해석을 통해 환자의 의식을 다른 단계에 존재할 수 있도록 데려간다고 본다. 우리는 인지적이며 정신분석적인 해석이 뇌의 다른 부분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고 있다. 언어적 상호작용은 정신적인 구조에 지속적인 수정과 자극을 주고 아마도 실제적으로 뇌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주제는, 인간의 경험이 언어에 의해 아주 강하게 구조화되는 사실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은, 언어학적이고 문법적인 형식 등에 의해 분화되지도 구조화되지도 않는 실재 세계에서의 삶을 상상하기에 부족하거나 혹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초기 유아 시기는 의식적 경험이 결코 언어로 구조화되지도 않는데 그 사실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사고, 철학, 예술 전통 안에는,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왜곡하기도 하지만, 한편 언어가 채색하여 다층적으로 뒤얽어 놓은 세계로부터 달아날 길도 없다는 생각이 있다. 언어가 없이도 성장하고, 마치 언어가 우리에게 감추는 어떤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 Kasper Hauser 이야기들과 Aveyron 의 야생 소년 이야기등은 호기심을 자아낸다. 물론 사실 이야기속에서 사회적 인지적 능력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뿐이지만 말이다. 어린이들을 매혹시키는 동물들도 말을 하는 돌리틀 선생의 이야기책들은, 어린이가 사회적 세계로 들어오면서 느끼는 당황스러움을 잘 그려 낸,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들의 변이일 것이다.
철학자 Nagel은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라는 논문에서 인간은 결코 그 경험이 어떨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 의식 상태만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종(species)의 신경체계나 감각체계를 갖고 있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아기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에도 같은 답을 해야 한다. 아기의 뇌는 이야기로 엮여진 기억을 담을 능력도 없고, 성인의 뇌와는 달리 좌우 반구도 매우 제한적으로 소통되며, 성인들은 친숙한 언어적 의식 체계의 내적 흐름도 결코 아기의 인식 상태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 때 아기였고 아기들과 상호작용하며 그 상호작용이 이해할 만 하다고 느낀다. 이런 점에서 아기의 마음의 세계가 성인의 언어적 세계와 다르다고 하여 아기의 마음의 세계에 전혀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다.
실험적으로 나는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나 일차과정 사고, 이차과정 사고, 전의식과 억압된 무의식, 무의식의 체계 등의 개념을 잠시 접어두고자 한다. 물론 이런 의식의 지형학적 개념들은 임상 상황에서 매우 유용하다. 이렇게 의식을 나누는 것은, 그런 어휘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는 문제들은 잘 설명하지만, 이런 관점은 아주 특별한 시각에서 의식의 제한된 양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의 분리에 의한 개념화가 조명하는 부분은 이주 분명히 밝힐 수 있지만, 그림자 속에 넣어 둔 부분은 잘 알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다른 모델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이 다양한 의식의 단계를(등급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아’ 나 ‘자기감’이 이 의식 단계들의 선상에 있고, 비록 일상적인 순간들이긴 하지만 이 의식의 단계 중 하나는 자아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단계들이 존재하는가? 글쎄 무한히 많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하나 이상일 것이다.
이 모델은, 정신분석적 작업이 분석가의 이해와 해석을 통해 환자의 의식을 다른 단계에 존재할 수 있도록 데려간다고 본다.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개인분석을 받고 있는 어떤 환자의 의식적인 동기는 매우 자애로운 것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단지 집단이 더 심층적인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집단 안에서 분노와 화를 내는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들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 행위는 집단이 그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그는 마침내 소외될 것이다. 분석가는 처음에는 의아할 것이다. 환자 자신이 그가 집단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면 감정이 좀 진정되게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정말 통찰로 가득 찬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석가는 그가 집단에 말로 기여한 것에 스며들어 있는 시간적 요소, 목소리 톤, 밑에 깔려있는 동기등의 비언어적인 신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분석가는 환자에게 그가 한편으로 집단에 공헌하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사실은 그가 자신에 대해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그가 집단안의 의사소통의 틀 바깥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의 돕고 싶은 욕구가, 사실은 화가 난 채로 공격하고, 주목받고 싶은 등등의 일련의 다른 동기들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볼 수 있다. A라고 부르는 환자는 그런 해석을 거부하고 그 해석이 의미하는 곳으로 가기를 거절할 수 있다. 그는 또 다른 어떤 일들이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설명을 고수한다. 한편 B라는 환자는 성찰을 한 후에 그 해석에 동의하고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고 여기며 그의 행위가 집단원 들의 반응을 일으키는데 어떤 역할을 했을 수 도 있다고 동의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해석은 분석시간에 일어나는 아주 작은 변화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초점의 변화와 관계있다. 이 해석을 받아들인 환자B는 물론 그가 아주 순응적인 사람이라 그럴 수 도 있지만 그의 관심의 초점을 과거의 한 이야기로부터 다른 것으로 바꾸고, 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렇다고 무의식적이지도 않았던 어떤 것에 정말로 관심을 갖기로 한다. (프로이드가 전의식상태로 불렀다) 이런 특별한 전이 해석과 더불어, 이 일이 단지 인지적 수준에서 일어날 수 도 있다. 직접적 전이로 일어나는 이와 유사한 일은 더욱 혼란스럽고 정서적인 요소들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인지적이며 정신분석적인 해석이 뇌의 다른 부분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안다.(Gabbard & Wesstern 2003) 인지적 작업은 뇌의 피질에 영향을 미치고 장기간의 분석작업은 피질 하부층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B 가 그의 행위의 동기들을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알게 되고 그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인다면, 다소 다른 방향에서 자신의 뇌를 구성하게 되고 그가 나중에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범위의 정보를 이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
현재 논의의 요점은 이런 변화가 언어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대화’ 라는 말을 모든 언어적 상호작용들을 위한 개략적 용어로도 사용하고, 다소 의미를 확장하여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 잡담, 분석 시간, 강의, 라디오청취, 독서등의 더 넓은 범위까지 포괄하려 한다. 그런 언어적 상호작용은 정신적인 구조에 지속적인 수정과 자극을 주고 아마도 실제적으로 뇌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대화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우리는 너무나 강렬하게 대화를 원한다. Edwin Wallace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언어는 정신을 설명할 뿐 아니라 정신을 구성하고, 인간이 자신을 세계에 나타내는 수단일 뿐 아니라 받아들이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다.’ 귀가 먹은 동료들을 본 적도 없는 귀거머리 어린이들도 자신 만의 수화를 발명한다.(Economist 2004) 날 때부터 장님인 아이들은 자기 손이나 남의 손을 본적이 없지만, 자신의 손을 사용하여 표현이 넘치는 몸짓을 한다.
정신분석에서 해석을 할 때 환자의 의식이 확장되고 어느 정도 분석가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의식이 재구성된다. 분석의 목적은 친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양가감정을 좀 더 견디고, 투사는 거두어들이고, 내사는 배제하며 자기와 타자 간에 더욱 정확한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깨달음을 형성하고 그 결과 환자가 정서-인지를 투자하는 세계를 수정하는데 ‘대화’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 준다. 환자의 언어 사용은 분석 과정 중에 어느 정도 재구성되는데, 바라건대, 그것이 그의 경험에 더욱 일치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더 넓은 범위의 경험을 담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작업은 15-42 개월 사이에 발생한 것의 부분적 변형이다

--그렇다면 아기가 원초언어단계를 지나 분명한 언어단계로 움직여갈 때 무엇이 변화하는가?
--프로이트는 욕구의 신체적 자리가 변화한다
--클라인은 원초언어 단계의 유아의 환상행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최근 연구; 엄마-아기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들은, 생애 첫해에 아기의 상호작용이 순차적으로 나이와 연관되어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을 드러낸다.
--아기가 한사람 혹은 그 이상의 타자와의 강렬한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 ‘잠재적 관계 기대’(다니엘 스턴의 문구)를 형성하고, 그것은 아기의 평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첫해에 형성되는 기대는 ‘밖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무의식적이고, 비언어적이며, 그 이후의 삶에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리 바꾸기가 쉽지 않다.


어린이가 인간으로 대화의 장에 진입하기 시작하는 것은 분명히 12-18개월 사이이다. 이때가 되어서야 유아는 인식 가능한 단어들을 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유아는 놀라운 속도로 5세 정도 까지 새로운 언어를 흡수한다. 그 이후에 아동기 사춘기를 거치며 속도가 다소 완화되지만 전 생애를 통해 천천히 언어습득은 계속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Eva Hoffman (1991) 이 그녀의 자서전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적어도 일시적으로 다소 변화된 성격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 글들에서는 12-15개월 전시기는 ‘언어 전 단계’라고 기술된다. 이 용어가 그닥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 시기에 유아는, 정확한 단어의 의미에 반응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음악적 그리고 몸짓과 관련된 요소들에 반응하며, 유일하게, 자신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언어를 사용하는 아동이나 어른과 상호작용하고 반응한다. 이미 2주된 아기는 엄마가 사용하는 특정의 단어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명백한 징후들을 보인다. 아기들은 일반적으로 언어로 표현된 의사소통에 잘 반응한다. 특히 엄마말의 음률의 고저나 강조점의 극적인 변화들에 수반되거나, 얼굴표정과 몸짓에 동반된 말들에 대해서 그렇다. 발달심리학자 Colwyn Trevarthen & Kenneth (2001)는 아기의 이러한 상호작용의 가능성과 관련된 아기의 태도를 기술하기 위해 ‘원초-대화 준비상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유비적으로 ‘원초 언어적’이라는 용어가 ‘전언어’ 라는 용어보다 능동적인 언어사용 이전의 발달시기를 기술하는데 더 선호된다.
그렇다면 아기가 원초 언어 단계를 지나 분명한 언어 단계로 움직여갈 때 무엇이 변화하는가? 물론 많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의 일인-모델을 구성하고 욕구의 신체적 자리가 변화한다고 보았다. 후에 그는 공격성, 애도, 죄책감들이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대상관계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멜라니 클라인은 이러한 통찰을 체계적으로 확장시키면서 불안과 무의식적 환상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고, 원초 언어 단계의 유아의 환상행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언어 사용 단계에 이른 유아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요즈음은 아기들을 더 정확하게 관찰하게 되면서, 고전적인 정신분석이, 자신을 조직하고 상호 주관적 앎을 성취할 수 있는 아기의 능력의 정도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기들이 교감적인 대인관계 환경을 이미 기대하며 태어난다는 풍부한 증거들이 있다. 호의적인 환경 안에서 아기들은 반응적일뿐 아니라 주도적인데, 이런 환경의 부재 자체가 아기들에게는 외상적일 수 있다. 엄마-아기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들은, 생애 첫해에 아기의 상호작용이 순차적으로 나이와 연관되어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아기와 엄마가 서로 놀이와 의사소통의 패턴을 바꾸어가는 것을 아주 복잡하게 잘 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Trevarthen & Aitken2001;Stern 1985) Trevarthen & Aitken은 애착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아기는 교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기가 한사람 혹은 그 이상의 타자와의 강렬한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 ‘잠재적 관계 기대’(다니엘 스턴의 문구)를 형성하고, 그것은 아기의 평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첫해에 형성되는 기대는 ‘밖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무의식적이고, 비언어적이며, 그 이후의 삶에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리 바꾸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것이 뇌의 신경적 연결 안에 복잡하게 각인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최근의 연구동향들은 원초적 언어단계와 언어단계 기능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장에서 나는 원초적 언어단계에서 언어, 정신 단계로 이행하면서 창조되는 차이를 논의의 전경에 두고 살피고자 한다. 그것은 아동이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내적 외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심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이 이행에 관해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첫째, 이행에 의해 무엇을 얻는가? 둘째는 이행에 의해 무엇을 상실하는가 이다. 또한 많은 종교 실천가들이 표현하듯이 어떤 점에서 언어가 깨달음에 잠재적으로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견해도 유의하고자 한다.


언어 의식단계로 이행하면서 무엇을 얻는가?
--능동적인 참여자로 사회적 합의의 세계로 들어간다.
--사회의 목적과 생물학적인 목적의 조화를 이룬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표현되는 정신분석상의 부분은 아마도 좌뇌와 우뇌 기능이 상호 화해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시기로 이해해야 한다
--초기 양육자에 대한 애착은 우뇌가 발달하기 위한 매개물이다
--정서조절을 위한 내면화 능력; 정서적 발달은 우반구의 의식의 심오한 비언어적인 내면성을 기초로 일어난다.
--언어적 의식단계로 이행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목적과 생물학적인 목적을 서로 통일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개인의 욕구 충족을 위한 기본적인 생물학적 동기를 좌절시키지 않고 사회에서 만족스럽게 사는 능력이다.

본질적으로, 이행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얻는 것이 있다. 즉 아이들이 대화하면서 항상 변화하는 관계망 안에서 능동적인 참여자로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인데, 바로 그 점이 인간을 사회속으로 묶어준다. 어떤 사회도 의미 있는 행동을 알려주고 그것에 관심을 갖는것이 납득되는 사회적 동의들이 있다. 그러므로 사회의 성공적인 멤버가 되기 위해 아이들이 편안하게 그 동의들 안으로 편입 될 필요가 있다. 분석적 언어에서, 이러한 동의들은 그것을 추구하게 하고 기술과 목적들을 지지하는 대상들과 함께 내면화되고 동일시된다. 신경과학은 신경통로라는 관점에서 같은 것을 이야기 한다. 즉, 신경통로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반응하면서 풍부해지고 강화되거나 혹은 다른 것과 비교하여 대안적으로 삭제되거나 한다. (Edelman 1992) 축구, 야구, 크리켓, 테니스, 등등의 놀이에서 공은 사회적 합의를 상징한다. 아이들은 공에서 눈을 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하며 공을 잡고, 차고, 던지고, 야구 배트나 크리켓을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많은 아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이 과정들을 습득한다. 그러나 자폐아동들은 그 강조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 시야에 들어오는 다른 것들보다 더 그 공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그들은 사회적 합의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실패하며 사회적 목표에 성공적으로 자신을 끼워 맞추지 못한다. 덜 병리적이지만 이민가계의 아이들도 자주 이런 상황과 관련된 어려움으로 고생을 한다. 친구들에게는 명백히 보이는 목적이 그에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의식의 경험을 이해하고 그것에 명료함을 주는 도구이며(프로이트) 이러한 목적들이 만들어지고 의사소통되는 매개물이다. 언어적 의사소통의 매력은 상당한 부분에서 우정이나 가족, 집단을 묶는 것이며 그것들이 함께 자라나고 사회적으로 이해된 목적을 추구하게 하고 또 그 목적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와는 상반되게 구성원에 의해 공유된 사회적 기술을 연습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집단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언어 의식의 단계로의 이행의 중요성은 과장될 수가 없다. 그래서 한 아이가 언어를 배울 때 사람들이 반 농담으로 이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행이 가진 이러한 힘 때문에 이행은 또한 커다란 위험을 수반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회적 목적이 아이의 생물학적인 목적을 왜곡하거나 밀어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본질적으로 두 측면에서 정의된다. 인간은 사회의 일원이면서 생물학적인 단위를 이룬다. 그는 사회구성원으로도 성공해야 하고 그 자신의 생물학적 목적도 달성해야 한다. 만약 아이가 속한 초기 사회가 - 초기에는 일차 양육자로 구성되는 작은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더 큰 체계로 넓혀지고 더 큰 방향으로 확대되면 - 아이의 생물학적인 목적을 그에게서 빼앗아 버리면 심리학적인 해가 발생한다.
신경과학의 용어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뇌의 두 반구의 신경 네트웍의 발달이다. 18개월까지 비언어적 우뇌가 우세하고 18개월부터 좌반구로부터 prefontal callosal 축삭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우뇌보다 좌뇌가 지배적이 되며 이것은 언어발달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언어구가 우세한 상태가 삶의 마지막까지 지속된다.
3년 6개월 즈음해서 상당한 발달상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 연령은, 클라인은 아니었지만,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시기가 시작한다고 본 시기이고, Fogony와 Target (1996,2000; Fogony and Target 1996)은 정신화가 시작되는 나이로 여긴다. 정신화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는 다른 내용을 가진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이다. 신경과학자 Schore 는, 이 시기에 좌뇌의 언어적 자기 표상과 우뇌의 비언어적 자기표상 사이에 정신적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라는 표제아래 정신분석이 설명했던 부분은 좌뇌와 우뇌 기능이 상호 화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시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따라서 첫 18개월간의 아이의 삶을 보면, 뇌가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비언어적 우뇌가 발달한다. 모유의 화학적 성분이 발달하는 아이의 필요에 따라 변하듯이 엄마의 정서적, 신체적 반응도 무의식적으로 아이의 발달하는 능력에 맞추어 적응한다. 애착이라는 용어는 그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초기 양육자에 대한 애착은 우뇌가 발달하기 위한 매개이며 그것은 시냅스의 패턴이 형성되고 삭제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여기서 한 가지 시사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Allan Schore(2003)는 특히 정서조절을 위한 내면화 능력은, 이 원초 언어적 단계의 대화로부터 생성되는 정신구조의 결과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정서조절은 단지 부정적 정서를 완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정서와 더 복잡한 자기-조직화에 필요한 조건을 확장시키는 것을 포함한다.(2003:4) 이것은 종교 행위의 기능들을 생각해 볼 때 다시 기억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후에 따라오는 모든 정서적 발달은 우반구 의식의 이 심오한 비언어적인 내면성을 기초로 일어난다. 사회적 의미를 지닌 공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은 발달하는 어린이에게 커다란 요구이다. 이것이 너무 많은 주의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왜곡이나 탈선의 심각한 이유가 될 수 도 있다. 정신분석은 소위 주지적 혹은 조적 방어를 하는 환자들에 대해 기술한다. 이들은 거의 강박적으로 지적 충일함에 넘치고, 자기 상황의 정서적 실재의 중요한 부분들과는 접촉 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이다. Winnicot(1960)은 아이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대신, 분명히 더 큰 엄마의 욕구에 순응하는 것을 배울 때 ‘거짓자기’를 발달시킨다고 썼다. 종종 상당히 일상적인 필요들 때문에, 예를 들어, 서열에 따른 성격구조에 자신을 맞출 필요와 내적 갈등이 참기 어려운 것일 때마다 이런 종류의 왜곡이 일어 날른지 모른다. Frank Sulloway (1996)는 과학 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에 많은 과학자들을 비교하였다. 그 과학자들은 아주 발 빠르게 새로운 이론을 지지했거나 완강하게 새 이론에 반대한 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융통성이 있거나 보수적이었다. 그가 일관되게 발견한 것은 보수적인 과학자들은 첫 째인 비율이 아주 높았고, 첫째 이후의 형제서열을 가진 과학자들은 아주 유연하였다. 이 사실은 형제서열이라는 세트가 결국 엄청나게 서로 다른 성격 구조를 낳게 할 만큼 압력이 아주 높았다는 점을 강도 높게 말한다.
만약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간다면, 언어적 의식단계로 이행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목적과 생물학적인 목적을 서로 통일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개인의 욕구 충족을 위한 기본적인 생물학적 동기를 좌절시키지 않고 사회에서 만족스럽게 사는 능력이다. 종종 이런 모순적인 욕구들의 필요에 고통스럽게 적응하는 것은 멜라니 클라인이 우울적 자리라고 명명한 것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우울적 자리가, 전통적으로 부분적인 것들을 전체적인 것으로 통일할 수 있는 능력 즉 자기의 부분들뿐 아니라 대상의 부분들을 통일할 수 있는 능력으로 기술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이행으로 인한 상실은 무엇인가?
--경험의 직접성과 생생함을 상실한다
--편집-분열적 자리와 같은 자아 상태들은 의식발달단계에서 원초적 언어단계를 나타낸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초적 언어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의 상태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원초적 언어단계에도 그 안에서 놀랍도록 정확하게 경험과 접촉하는 감각들이 존재한다.
--종교들에 의해 유지되어온 확신이, 개인이 발달하면서 원초적 언어단계에서 생생히 경험한 여러 가지 일화들에 의존할지도 모른다
--임상적 증거는 아주 이른 시기의 경험도 비록 일화적 기억들의 형태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언어적 의식안으로 옮겨진다고 제안한다.
--아기에 의해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경험되는 감정의 질이 있다.
--의미있는 경험이)크게 원칙적으로 성취되는 것들은 내적, 외적으로 그리고 관심을 공유한 타자들과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런 대화에 영향을 주는 내면의 판형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뇌의 우반구에 어떤 식으로든 자리 잡게 된 원초적 언어단계에서의 초기 경험에 대해 생각할 때, 어쩌면 이런 영향의 근원에 대해 일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경험들은 후기의 많은 종류의 확신들을 지지한다
--후기 경험의 어떤 종류들은 원초적 언어단계와 언어적 의식단계 사이를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의식의 두 종류들 사이에 통일성을 확립하는 것은 특별한 힘을 가지며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느껴진다
--영원’의 경험들은 일차,이차 사고 과정의 의식확장으로부터, 그러나 지속적 확신과는 구별해야한다

언어적 의식단계로 이행하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보다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프로이드가 무의식 체계의 정신 기능의 특징을 일차사고 과정으로 기술한 것은, 부분대상들과 깊은 무의식적 환상’의 무질서한 혼돈과 관련되어 있는 클라인의 편집-분열적 자리의 많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나는 프로이드가 맹목적인 무의식적 의지나 쇼펜하우어의 ‘생에의 분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이 생의 의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내면’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였다. 그것은 내부(일인칭 사람의)에서는 의지로서, 그리고 외부(삼인칭 사람)로부터는 ‘표상’이라는 두 가지 양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쇼펜하우어 1819) 프로이드가 말했듯이 무의식은 소망할 수 있을 뿐이다.
욕구나 의지에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원초 언어 단계 발달시기에 기쁨이나 고통이 된다. 이곳이 프로이드의 ‘그것은 내 안에 있어야 한다’ 혹은 ‘그것은 내 밖에 있어야 한다’라고 실재를 독단적으로 판단하는 ‘최초의 쾌락-자아’로 불렀던 것을 만나는 곳이다. 프로이드(1925)가 말하듯이, 처음에는 자아-소외적인, 외부적인, 그리고 나쁜 것은 다 동의어이고 그 후에 자아-동조적인, 내부적인, 그리고 좋은 것과 맞추어진다(matched). 이런 판단은 클라인(1946)이 후에 일차적 분열이라고 기술한 것을 형성하는 기제를 구성하게 된다. 일차적 분열이란 자기와 세계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분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시제로 이루어지는 생생한 경험은 언어 의식단계로 이행하면서 상실된다. 마약의 매력은, 너무나 명료하면서 초시간적인(timeless) 질을 가지고 있던 유아기의 물리적 감각의 일부를 다시 체험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Esther Bick (Bick 1968; Harris 1982) 이 설명하는 '점착적인 동일시‘도, 생각 없이 지각 경험에만 집착함으로써, 발달해 나가고 변화하는 것에 반하는 방어적 책략인 이 원초 언어 단계의 의식에 속해 있다.
의식의 발달단계들에서 의식자체의 혼돈스러운 상태들은 몇몇 이론가들로 하여금 대칭적이며 뒤집을수 있는 문법을 사용하는 특징을 가진 일차적 사고과정이 주로 유아기의 의식상태를 이룬다고 믿게 만들었다. 또한 편집-분열적 자리와 같은 자아 상태들은 의식발달단계에서 원초적 언어단계를 나타낸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초적 언어가 정상적으로 기능할때의 상태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원초적 언어단계에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경험과 접촉하는 감각들이 존재하는데, 만약 그것이 단지 후기 의식상태의 관점에서 판단된다면 이런 점들이 모호해진다.
원초적 언어 단계가 가진 감각들 중의 하나는 물리적으로 느끼는 감각의 생생함이다. 나는 또 다른 하나는 정서적 경험의 어떠한 성질(sort)에 접촉하는 특질(quality)이다 라고 생각한다.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책에서 프로이트는, 그가 <토템과 터부>에서 처음으로 논의를 시작했던 유전적인 것을 애호하는 논점으로 되돌아 갔다. 그는 인간가족의 원시시대의 경험이 인간의 정신에 영원한 흔적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현 시대에는 이상하게 보이며 현대 생물학자들에 의해서는 거부되었다. 왜냐하면 현대 생물학자들은 DNA상의 변화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하고 개체 유기체가 경험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옳다면 인간정신에 새겨진 영원한 흔적이 종교적 확신의 토대를 이룬다는 프로이드의 생각은 갈 곳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인간 종을 과거 경험에 연결시키는 대신에, 종교들에 의해 유지되어온 확신이, 개인이 발달하면서 원초적 언어단계에서 생생히 경험한 여러 가지 일화들에 의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의 사상은 복권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험들이 언어로 표현 가능한 형태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화적 기억은 뇌의 해마상 융기(hippocampus)라는 조직의 성숙에 의존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유아가 18개월이라는 경계를 넘어설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은 우뇌 구조에 잠재적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상적 증거는 아주 이른 시기의 경험이 비록 일화적 기억들의 형태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언어적 의식 안으로 옮겨진다고 제안한다.

S 씨는 유능한 50대 남자이고 나는 그 분 치료의 지도감독을 하고 있다. 이 환자는 여성 치료자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철수했다. 그 이후에는 치료자를 경멸했으며 더욱 절망적으로 되었다. 그가 반복적으로 말했던 것은 '나를 데려갔어야지 (you don't pick me up)' 였다. 치료자와 S 씨는 둘 다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 속에는 환자의 매우 강렬한 증오가 들어 있었다. 치료자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언젠가의 그의 경험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조용히 몇 회기동안 충분히 머물러 주고 나서야, 그는 자기가 조기출산아 였고 생후 첫 주간은 인큐베이터에 있었다는 것을 언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유리벽 건너 편에서 그를 지켜 볼 수는 있었지만 그를 만질 수는 없었다. (치료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전언어적 의사소통은 두 가지 방식으로 취해 질 수 있다. 환자는, 그의 엄마가 과거에 그러했듯이, 완전히 무력했고 화는 났지만 부적절했던 엄마가 되도록 치료자를 그 상황 안으로 집어 넣었던 것이다. ) 그의 거대한 절망, 분노 ,그리고 경멸이 이 초기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는지 물론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픽업되지 않았다는 그의 초기 경험에 의거한 그의 강렬한 감정에 대한 치료자의 주의 깊은 해석은, 그에게 위협적이었던 그가 빠진 곤경으로부터 그를 돕는데 현저한 도움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정서적 상호작용 안에서의 아기의 경험은 매우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기 있고 사랑이 넘치며 공감적인 엄마와 더불어 먹고 기저귀를 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상호과정이 2개월 된 아이에게 주는 기쁨은, 아이의 우뇌에 확실성을 가진 ‘지식’ 으로 저장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할 것 같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면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은 경이롭고 활력을 주는 지식이다’ 라고 요약될 지도 모른다. 후속적인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경험들은 최초경험의 확실성을 보증해 준다. 성인의 삶에서 느끼는 강력한 즐거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리고 선함의 일부로서의 타자와 자기의 선함에 대한 확신은, 생애 초기의 확실하고 양가적이지 않은 정서에 다시 접촉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엄마가 자신이 가진 열정의 열렬함을 두려워하고 애매모호하다면, 또한 사랑받을만하다는 자신의 가치를 의심 한다면, 아기는 혼란스럽고 혐오스러운 신호들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이후의 삶에서도 사랑의 가능성과 열렬한 애정에 직면해서 양가적이거나 회피적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 중에 커다란 평화의 순간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 순간들은 무엇도 더해질 필요가 없는 순간들이고 아기가 분명한 내용이나 흥분됨이 없이 엄마의 백일몽 상태를 경험하는 순간들일 수 있다. 그러한 때에 엄마와 아기 양자의 숨쉬기만이 의식적인 알아차림의 중심 대상일 것이다. 그런 순간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더욱 흥분되는 사랑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순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선한 성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Rachel Blass(2003) 는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프로이트가, 비록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그의 신념이나, 관찰할 만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강력하게 유지해 온, 그 자신이 갖고 있는 확신에 대해 매우 기이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우리는 엄마와 아기의 초기 의사소통이 가진 특징들 중의 몇몇이 이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엄마라는 사람들의 환한 얼굴과 알기 쉬운 정서적 표현은 아기에게 커다란 기쁨의 근원이다. 그리고 진실을 사랑하는 것의 근원도 엄마들의 이러한 반응들 속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엄마의 정서적으로 복잡하고 어두운 표현들은 고통과 슬픔의 근원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례들을 통해 나는 아기에 의해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경험되는 감정의 특질을 말하고 싶다. 후기에 발달되는 언어는 그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너무나 둔하고 부정확한 도구이다. 인생후기에도 계속해서 유지되는 확신의 근원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다음과 같은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후기 경험의 어떤 종류들은 원초적 언어단계와 언어적 의식단계 사이를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의식의 두 종류들 사이에 통일성을 확립하는 것은 특별한 힘을 가지며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느껴진다. Hans Loewald (1978)는 신비가들에 의해 알려진 ‘이,- 이 때 영원은 ‘끊임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초시간적’이라는 의미인데- 일차적 사고 과정 그리고 이차적 사고 과정의 정신작용이 교류하여 서로 알려지게 될 때 의식의 확장이 일어나면서 생길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아마 예술의 힘도 언어로 된 의식단계와 원초적 언어단계의 의식 사이를 서로 연결하는 것과 관계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예술작품은 언어적이며 생각하는 뇌와 비언어적, 감각적, 정서적인 우뇌 둘 다를,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비슷하고 조화를 이루는 메시지들로 통하게 한다. 이것은 어떤 작품의 주제가 비극적이거나 괴롭히는 것 일 때라도, 그 예술작품이 특별히 만족을 주고 작품의 질이 안정적일 때, 성공적인 예술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이 피차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는 이런 설명이, 매우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확신, 회심, 심미적인 만족이 일어나는 순간들을 어떻게 우리가 이성적으로 설득력 있게 묘사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확실하게 오래 유지되는 확신에 대해서는 적합한 토대를 제공하지 못한다. 경험이란, 그것이 아무리 인상적이라 하더라도, 단지 경험일 뿐이며, 다른 여러 경험들처럼 그것의 의미와 현존하는 가치들, 더 큰 세계관 등등과 관련성 등을 탐구하는 것에 열려있어야 한다. 직관이 일어나는 매우 흥분된 순간들은, 다시 생각해 보면, 텅 비고, 하찮고, 혹 다소 위험스럽게 우리를 잘못 인도했던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순간에는 ‘확실했던’는 흥분되고 일시적인 순간들과 -회심경험이 이런 종류일 수 있는데- Giordano Bruno 나 Darwin 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Martin Luther King 이나 Dietrich Bonhoeffer가 정의를 위해 종교적인 관심을 가졌던, 즉 지속적이며 책임을 지는, 원칙이 있는 확신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질문은 이 장의 범위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그러한 마음을 가진 집단에 의해 이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to answer it would bring in the importance of validation by a like-minded group) 고독한 구도자들의 신화들도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의미있는 경험이)크게 원칙적으로 성취되는 것들은 내적, 외적으로 그리고 관심을 공유한 타자들과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런 대화에 영향을 주는 내면의 판형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뇌의 우반구에 어떤 식으로든 자리 잡게 된 원초적 언어단계에서의 초기 경험에 대해 생각할 때, 어쩌면 이런 영향의 근원에 대해 일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경험들은 후기의 많은 종류의 확신들을 지지한다. 그 확신들은 뿌리 깊은 살의로 가득 찬 증오, 병리적인 시기심등의 부정적인 것들이나 진리, 정의, 연민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들과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다 포함한다. 엄마와 아기가 연결되어 둘 사이에 평화의 순간들이 생길 때, 그 순간들은 무엇도 더 필요하지 않은 순간들이며, 그 존재 방식은 감정적으로 강렬한 그런 종류의 것이기 보다, 오히려 존재론적으로 ‘선함’을 믿는 데 열려 있게 할 것이다. 그런 확신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어떨 때는 비형식적이고 우연한 사건들을 통해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는 명상이나 기도 같은 형식을 갖춘 경험들을 통해 얻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험들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아마도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의 멤버쉽이라는 매혹적인 것에서 벗어나와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도 이 초기 경험과의 비언어적 재-접촉일지도 모른다. Bion(1992:152) 은 그의 명상록(Cogitation)의 한 부분에서 플라톤의 유명한 빛을 등진 동굴안의 집단으로서의 인류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아마도 집단의 멤버쉽이 인간을 너무 강력하게 끌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보는’ 것을 정말로 자세히 보기 위하여 방향을 그 쪽으로 돌리는 것을 방해한다는 그의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제안하였다.

이런 사고-실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의식의 연속물들의 부분의 특징은 선행하는 의식의 자료들을 매우 경제적으로 합성하는 것이다
--의식이 층을 이루고 있으면서 그 층에 어떤 위계구조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생각은 또 다른 층 즉 관조적인 의식의 층 혹은 관조적 자리(Contemplative Position)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관조적 자리는 이로부터 즉각적으로 행동 할 필요 없이 세계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경험’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 할 수 있는 자리이다.
--관조적 자리는 좌절, 불안 그리고 흥분을 견디는 능력과 동기가 일어나는 대로 행동하기 보다 동기를 기꺼이 생각해 보는 능력을 포함하는 자아-상태 혹은 일련의 자아-상태들이다.
--관조적 자리도 이상화될 수 있다. 낮은 수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관조적 자리는 ‘더 높은 실재’ 나 궁극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해와 관조를 위해, 관조적 자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회피하는 일상적인 동기들을 초월한다.

우리는 이 사고-실험을 통해 무엇을 얻게 되었는가? 우리는 프로이드가 ‘무의식’ 이라고 부른 것들과, 멜라니 클라인이 다른 종류의 의식으로서 ‘자리들’이라고 부른 것들을 개념화 하면서 논의를 출발하였다. 이 작업은, 의식이 일련의 여러 층으로 존재하며, 편집-분열적 자리와 우울적 자리는 의식의 두 부분(혹은 부분들의 커다란 두 부류)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을 살펴보도록 한다. 의식의 연속물들의 부분의 특징은 선행하는 의식의 자료들을 매우 경제적으로 합성하는 것과 주체의 전체적인 상황을 더 큰 관점에서 살펴 보도록 허용하는 것, 그리고 주체의 세계에 이식되어 온 것들에 대해 동정심을 확대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흔히 정신분석적 용어는 이것을 그의 ‘대상’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다 공감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러한 용어는 경험과 좀 떨어진 듯하다. 왜냐하면 공감적 마음에서는 타자도 항상 주체로 인식되기 때문이다.Black 2004a )
다양한 이론적 모델들에 더하여, 의식이 정신발달의 다양한 차원들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에 잘 대처하도록 디자인된다면, 우리는 다층적이면서 위계구조를 가진 의식의 그림을 포함시킨다. 이 그림은 또 다른 층 즉 관조적인 의식의 층 혹은 관조적 자리(Contemplative Position)를 생각하게 하는데 이 자리는 정신분석이 사용하고 있는 현존하는 발달적 구조적 모델에 별다른 편견이 없이도 수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관조적 자리는 이로부터 즉각적으로 행동 할 필요 없이 세계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경험’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 할 수 있는 자리이다. 관조적 자리의 발달적 그리고 신경학적인 근원은 유아기의 초기 시절에 엄마와 함께 경험했던 평안의 시간들에서 찾아 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들은 그 이후에 잠재적인 형태로 우반구의 비언어적 구조 안에 새겨져 있다.
불교의 알아차림을 위주로 하는 위빠사나와 같은 명상들에서는 강박적인 행동이나 반응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위의 명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관계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 세계는 정지하여 있는 것 같고 비-언어적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더욱 견고하여 한결같은 경험들은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조용히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최초경험의 확실성을 보증해주는, 언어적 수준의 아무것도 더 할 필요가 없었던 엄마와의 원초적 언어 단계에서의, ‘내용은 없었지만’ 아주 안정적이었던 ‘함께 있음’ 에 내재된 정서적 기억들에 접촉하는 하는 것보다, 의식의 위와 같은 경험들은 훨씬 깊다. 최근에는 정신분석과 명상경험의 관계에 대한 토론들이 있어 왔다.(예를 들어 James Grotstein (2000). 그롯슈타인의 주장은 나 자신의 주장과는 다른 형태를 띠지만, 그의 ‘초월적 자리(trancendent position)' 는 어떤 관점에서 나의 관조적 자리와 평행을 이룬다.) 명상이 뚜렷이 측정 할 수 있는 효과들을 일으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신체적 외상으로부터 회복이 일어나는 시간에 있어서나, 순환계나 면역체계의 작동의 질을 높이거나, MRI 스캔에 의해 측정 가능한 신경 활동의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패턴들을 창조하는 것등이 그것이다.(Benson 1976;d'Aquili and Newberg 1999; Goleman 2003; Guardian 2004). 그간 정신분석이 말하는 정신 구도안에서는 이런 발견들을 위한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명상이 신체와 정서적 기능에 좋은 결과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명상이 식별할 만 한 심리구조를 만들어내고 ’건강‘ 에 기여한다는 점이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함을 시사한다. 또 이 의식 상태는 Engler 와 Mitchell(2003) 이 불교의 무아의 교리를 가지고 최근에 논의했던 더욱 정확하고 훨씬 범위가 확대된 존재론적 지각 혹은 인식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관조적 자리는 우울적 자리나 편집-분열적 자리들에 필적할 만 자리이다. 이 자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는 특징들 즉, 좌절, 불안 그리고 흥분을 견디는 능력과 동기가 일어나는 대로 행동하기 보다 동기를 기꺼이 생각해 보는 능력을 포함하는 자아-상태 혹은 일련의 자아-상태들이다. Allan Schore 의 성공적인 정서-조절은 긍정적인 정서들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자비로 가득 찬 마음상태를 창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명상이 긍정적인 정서를 더 신장시킬 수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인도종교의 산스크리트 단어 중 ‘자비(compassion)’ 로 번역되는 말은 영향력을 뜻하는데 그 영향력이 먼저 자기를 향하고 그 이후에 타자를 향한다고 한다; Goleman 2003) 확실히 타종교들에서 헌신과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
정신의 다른 상태들처럼, 관조적 자리도 이상화될 수 있다. 일상적인 관계들이나 책임감등을 거부하는 비속한 명상가의 모습을 만나면 이 점을 알아채게 된다. 그러나 관조적 자리의 이상화되지 않은(방어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진지하게 추구되는) 경험은 그나 그녀가 믿을만한 사람이 되게 하고 보다 깊은 의미에서(in a profound sense)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 가면, 관조적 자리는 ‘초월’ 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이해와 관조를 위해, 관조적 자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회피하는 일상적인 동기들을 초월한다. 공감의 일반적인 성질들을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Black 2004), 충족되지 않은 자기애적 갈망을 위로하는 정도만큼만 정의가 바람직하다고 보기 보다 (Freud 1921), 정의와 자비 그 자체를 위한 동기를 얻으려는 긍정적인 바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혹은 뇌의 두 반구를 표상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 자리는 이로부터 언어적 그리고 비언어적 의식이 서로 일치되는 것이 고려될 수도 그리고 좀 더 나은 상태로 개선되는, 또 다른 자리로 이해할 수 도 있을지 모른다.
관조적 자리는 ‘더 높은 실재’ 나 궁극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관조적 자리는 몇몇 독실한 신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신경과학자 Francisco Varela 가 ‘ 정신현상의 연구는 사람을 경험하고 사람에 의해 연구되는 과학, 즉, 인지 과학에서의 내재적 순환’으로 부른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Varela 1996; Black 2004b) 우리는 현상학적인 세계에 머무르고 있고 ‘물자체’의 세계는 우리에게 닫혀 있다. 그러므로 어떤 과학적인 사상가도 그들의 확신을 계속 유지하고 그들이 신봉하는 가치들을 의심하지 않고 지지하기 위하여 의식적인 신념이 필요하고 객관적 증거를 넘어서는 주관적 헌신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과학적 사상가도, 확신들이 보존되어야 하거나 의심없이 가치들이 지지되어야 한다면, 의식적인 ‘믿음’ 의 필요성, 즉, 증거를 사용하여 확실히 하는 것을 넘어서는 주관적 헌신의 행위를 다 없앨 수 없다.} 이것은 정의나 자비등의 더 큰 범주의 가치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정의나 자비등의 가치는 일상적인 욕동에 기초한 동기들과 분명하게 경쟁한다. 우울적 자리를 설명하거나 대상들을 다룰 때 시기심, 감사, 잔인함, 후회등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정신분석에서 오히려 더 잘 설명되어 왔던, 친밀한 영역의 가치들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은 주체가 자신의 주관적 확신에 자기 자신을 맡길 준비가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객관적 증거에 의해 보증될 수 없는 주관적 헌신 행위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분석의 마지막까지도, 주관성은 객관적으로 검토된 객관적 증거에 의해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Nagel 1979b; Velmans 2000; Black 2004b) 과학자가 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은 믿음과 관련된 결정들이 만들어지고, 지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조건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관조적 자리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종교적 사유 방식들에 대해 느끼고 있는, 즉 종교적 사유방식들이 환자가 사회적, 생물학적 삶의 실제 갈등들로부터 도피하려는 목적에 도움을 줄 수 도 있다는, 의혹의 여지를 준다. 이것은 전체적인 환자의 인생의 결과가 취약하고, 불완전하며 때때로 재난의 수준일 때, 더 낮은 수준의 갈등을 피함으로써, 상위 수준의 의식이 방어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환자가 청소년기의 편집-분열적 자리를 건너 뛰어, 초기 성인기나 중년기를 붕괴로 이끄는 조숙한 ‘우울적 자리’의 성숙한 태도를 취할 때 이런 경우를 보게 된다. 같은 종류의 일들이 때때로 일방적으로 영적인 발달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기도 한다.
2011-08-24 10: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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