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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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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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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변형의 길
Michael Parsons
번역: 김선구

우리가 정신분석과 종교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인지하느냐 하는 것은 첫 번째 지점에서 어떻게 서로에 대해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어떤 개념들은 종교에 대해 아마도 별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며, 어떤 종교적인 태도들은 정신분석학적인 사고에 대해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분석가들은 정신분석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관찰에 의해 승인된 경험주의적인 학문으로 본다. 이러한 시도는 경험적인 연구를 선호하는 애착이론이나 혹은 신경심리학과 같은 이론적인 토대를 지닌 분야들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정신분석에서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프로이트는 예외적이다. Freud(1927)는 환상의 미래에서 종교를 정신분석의 과학적 가치에 의해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유한 주관적 경험의 문제다. 이런 경우에 대부분의 문제들은 경험적으로 확인되거나 한정되거나, 심지어는 아마도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정신분석과 종교의 관계는 보다 가치 있는 검토가 있을 수 있다.
종교와 관련해서 일치하는 차이점들이 있다. 한 관점은 신성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도그마의 형태나 계시와 같은 외재적인 것으로서의 지식의 원천을 바라보며, 성서와 종교적 제도에 권위를 부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의 근거를 앎과 권위적인 확신이 그들 자신의 영적 경험의 신뢰성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추구되어 진다. 그리고 책임성에 대한 그의 감각은 외적 구조에 대한 순종이기 보다는 그 경험 안에 근거하고 있다.
전자의 경향을 가진 태도는 정신분석에 대해 자기 결정과 내향적 자율성에 대해 충동질하면서 정신분석을 계시된 진리의 권위와 규정된 도덕성에 대한 하나의 위협으로 바라본다. 영적인 기질인 후자는 정신분석에 대해 내면성과 관련해 고유한 길을 지닌 하나의 훈련으로써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정신분석과 종교의 관계가 경쟁의 관계인지 협력의 관계인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답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관점에 따라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둘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상호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종교와 정신분석을 서로 교차하고 있는 두 개의 원으로 상상한다면,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자신을 어디에 배치할지를 택할 수 있다. 우리는 둘이 겹쳐지는 영역을 피해서 잘 지낼 수 있고, 그럴 경우 다른 집단의 그 누구와도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풍성한 대화가 없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의 관심은 그림에서 두 개의 원이 겹쳐지는 부분에 있으며 정신분석과 접촉 가능한 관점들을 지닌 다양한 영적 전통들 사이에서 널리 펼쳐지는 탐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시편 142편에서 시편기자는 ‘은밀하게 덫을 놓은’적의 박해로 인한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한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며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다. 그는 울부짖는다:

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건져 주옵소서 : 그들은 나보다 강합니다
내 영혼을 감옥에서 끌어내 주셔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해 주십시오.
(시편 142:6~7)
이 시편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개입하여 사악한 세력을 제압하기를 간청하는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해달라는 전형적인 탄원시의 종류로 들린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어떤가? 만일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길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가 감옥에 있을지라도 그는 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가? 명백히 이것은 그와 같은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다른 종류의 감옥이다. ‘내 영혼의 감옥에서 끌어내 주소서’시편기자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감옥을 만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나보다 너무나도 강한’박해자는 정신분석적으로 시편기자 자신의 내면 세계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어떤 것에도 감사를 느낄 수 없는 박해의 느낌을 지닌 마음의 상태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벗어나고 싶은 내면의 감옥이다.
어떤 외적인 사건이나 일의 상태에 대한 묘사가 또한 내적인 심리 상황으로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분석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측면이다. 만일 환자가 누군가에 의해 공격받고 간섭받는다는 느낌을 호소할 경우, 분석가는 환자자신이 자신의 인격에 대해 요구하고 조종하는 것에 의해 환자 자신이 어떻게 박해받는 느낌을 지니는지를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 해석해 줄 수 있다. 다른 경우에 있는 한 환자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이 환자는 한 지역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의시설과 환경을 어떻게 힘을 합쳐서 개선하고 있는지를 그러한 일을 함께 조종하고 협조할 수 없는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했다. 나는 환자의 내면 상태와 그리고 그 자신의 다른 면들이 어떻게 그의 자원을 움직이고 그 안에서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언급함으로서 이러한 예들을 말하고 있다. (Parsons 2000:173). 예레미야서에는 외면으로부터 내면으로의 깨달음으로 이동해가는 놀랄만한 예가 있다.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탄원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 후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에 새로운 단계를 예언한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이 아니하다...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 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1~33)

이 구절은 영국성공회의 전통적인 성찬식 양식에서 내면성을 강조하면서 교독으로 사용된다. 사제는 십계명을 암송한다. 이 때 각 각의 계명을 암송할 때마다 회중들은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법을 지킬 수 있게 우리의 가슴에 마음을 기울이소서. 라고 화답한다. 가슴에 마음을 기울이는 내용이지만 강조점은 법에 복종하는데 있다. 그렇지만 마지막 열 번째 계명 후에 회중의 응답은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우리는 간청합니다. 이 모든 율법을 내 마음에 새겨주소서’이것은 외적인 행동에서 내재화로의 이동을 특징지으며, 그런 결과로부터 오는 변화된 내적인 상태로의 이동을 특징짓는다. 예레미아의 구절은 이러한 이동을 영적인 혹은 심리적인 진전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같은 경우가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서 나타난다. 초기기독교회는 유대교로의 개종과 관련해서 분열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비유대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할례를 받아야하느냐를 의미했다. 바울의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유대인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겉모양으로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
오히려 속사람으로(내면적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마음과 영 안에서 받 는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로마서 2:28~29)

이것은 정신분석에 잘 일치하는 태도다. 정신분석과 종교는 모두 외적으로부터 내적으로의 이해(인식)의 전환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은 내재화 상태에 따라서 진정한 내적 성장과 발전으로 나아가게 된다. 건강한 내적 대상과의 관계성이 바로 그것이다. 내적인 삶에 있어서의 질의 중요성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했던 예수의 꾸지람에서 나타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마 23:27)

무덤’이라는 단어는 명확하다. 예수는 영적 죽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반대의 상태인 또 다른 모습으로의 변형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 입니다.
(고전 15:22)
교회의 부활절 찬송에서는 이와 같은 증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바울은 죽음으로부터 영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으로 변화하는 내적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
누군가에게 일종의 생생함을 더 많이 갖도록 돕는 것이 또한 정신분석가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러한 자세는 Marion Milner의 글‘얼마나 생동감있는 느낌인가에 관한 놀라운 경험’(Milner 1950:159)에 나타나 있다. 위니캇의 자서전적 단편 Not Less than Everything은 다음과 같은 기도와 함께 시작한다. ‘오 하나님! 내가 죽을 때에도 살아있게 하소서’(Winnicott, C, 1989:4). 이러한 것들은 특별히 정신분석적인 언급이 아니다: Milner와 Winnicott은 ‘행동하는 정신분석’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는 그들의 작업 안에서는 심오한 인성의 경험과 정신분석학적 사고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대해서 탁월하다. 특별히 심리적으로 생동감이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정신분석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Michael Eigen이다. 그의 책 ‘심리적 죽음’Psychic Deadness(Eigen 1996:69~87)의 한 장을 위니캇의 사상으로 채우고 있으며, 서문에서 말하기를 ‘위니캇의 연구는 생동감에 관한 일대기인데 그것은 유아기로부터 전 생애에 이르기까지 펼쳐 보여지고 있다’.(p xxi). 우리는 Eigen이 의미하는 바를 Winnicott과 함께 진행한 Guntrip(1975) 의 자기분석에 대한 설명 안에서 볼 수 있다. Guntrip이 세 살 반이 되었을 때 그의 남동생은 간난 아기로 죽었다. Winnicott은 이 사건 후에 Guntrip은 다음과 같은 것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당신은 붕괴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삶이 계속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무진 애 를 썼습니다. 그리고 부대자루 안에서 자면서 무의식을 억압했습니다... 당신의 문제 는 바로 그 붕괴된 병적인 상태를 전혀 해결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당신은 그럼에도 불 구하고 자신을 생기 있게 지켰어야 했습니다. 당신 자신의 성장하는 모습에 대해 인정해 주질 못했습니다... 당신은‘그저 자라고, 그저 숨 쉬는 것’이 아닌 ‘활력 있게 살 기’being active 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Guntrip 1975:152)

Guntrip은 한번은 Winnicott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했다 : ‘우리는 Freud와 다릅니다. 그는 증상을 치료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 삶 전체와 사랑에 대해 관심하고 있습니다’(Guntrip 1975:153). 나는 Freud가 단지 증상의 치료에 대해서만 관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Winnicott은 정신분석의 본질에 대한 특징을 드러냈다고 본다. - 그와 같은 관점을 Thomas Ogden(1995)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입장을 표명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정신 병리는 한 인간 존재로서 충분히 살아있기 위한 개인의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들이라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분석의 목표는 무의식의 내부정신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나 증상의 완화라기보다는, 반영적인 주체성과 자기이해의 강화와 personal agency의 능력을 증대시키는데 있다. 비록 사람의 살아있게 존재 하는 능력은 마음속에서 위에서 언급한 능력들이 서로 엉켜있지만, 살아있음의 경험은 이러한 능력들을 끌어올리는 하나의 속성이며 또한 살아있음의 경험은 자신만의 방식 안에서 분석적 경험의 한 측면으로 반드시 여겨져야만 한다.
(Ogden 1995:696, orginal italics)

Winnicott의 저서 놀이와 현실에는 ‘우리의 삶이 있는 곳’이라는 장이 있다. (Winnicott 1971:104~110) 나는 ‘우리의 경험이 위치하는 영역’이라는 구절을 수년 동안 ‘내가 살고 있는 집’이라는 같은 방식으로 읽으면서 이해했다. 그러나 나는 그 구절을 ‘나의 삶(살아있음)Live이 있는 곳’- 그곳은 우리가 그것을 다룰 때 충만하게 살아있게 되는 그런 곳을 의미한다-으로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곳은 Winnicott이 중간영역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그 잠재적 공간은 아동기의 전이적 공간이 발전해가는 것으로서 생애 전반을 걸쳐서 다양한 형태로 존속하는 그런 공간이다. 이 공간의 특징적인 성격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중간지대 안에서 우리 자신, 우리의 바램들과 감정들과는 다른 외적 현실과 우리자신의 상상력 있는 창조세계라고 할 수 있는 내적현실은 서로를 배제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 안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통제하지 않는 그런 조건에서 우리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발견되어 질 수 있고 생성되어질 수도 있다.
내적현실과 외적현실은 영적 언어 안에서 초월과 내재라는 생각에 의해 어울려진다. 초월적이란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우리의 것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타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그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인식하려고 애쓰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 다고 하겠느냐?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 보다 높다.
(이사야 40:25:55:8~9)

내면성이란 우리에게 아주 깊이 내재되어 있어서 우리의 존재의 기반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시대의 신학자 Paul Tillich가 주목할 만하게 명확히 드러내 주었다. 14세기 동방정교회의 신학자 Nicolas Cabasilas는 인간 그리스도는 ‘우리자신의 영혼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 분’(quoted in Ware 1997:70)이라고 기록했다, 한편 꾸란(코란)에서 알라는 '사람의 목에 흐르는 정맥’neck vein 보다도 인간에게 더 가까우신 분’(50:16)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종교적 전통에 있어서 영적인 가르침은 이러한 두 가지의 관점 모두를 어느 한쪽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함께 이해해야 할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꾸란의 핵심 구절은 말한다.: ‘우리(알라)는 그들에게 우리의 표징들을 지평선위에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 보여줄 것이다’(41:53) 제2의 영적인 권위가 있는 하디스(*역자주: Muhammad와 그 교우의 언행록)에서는 Muhammad의 가르침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알라의 말을 전하고 있다 : ‘하늘과 땅은 나(알라)를 담을 수 없으나 나의 신뢰할 만한 추종자의 마음은 나를 담을 수 있다’(Burckhardt 1959:115). 성서의 시편기자는 두 개의 측면을 다음과 같이 함께 놓고 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은 다 아십니다. 나의 생각을 오래 전부터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 다.
그와 같은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 계시고, 스올(지하세계)에 내려가더라도 주님 은 거기에 계십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 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시 139)

이 장엄한 언어는 ‘신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며, 어떤 종교적인 언어는 ‘신의 초월성’과 ‘신의 내재성’에 대한 언급으로 뛰어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좀 서툴지만 이와 같은 종류의 단어를 깊이 더 파내려가 보고 싶어서 이와 같은 영적인 예들을 꼼꼼하게 선택해본다. 도교의 경전인 도덕경 Tao Te Ching(1963)은 존재 윈리 보다 더 근원적인 도를 말하는 데, 이 도는 우주에 충만하고 도는 천하 만물의 기원이라고 선언한다. 그렇지만 도는 또한 작고, 내면적이며 겸손하다 -‘계곡의 정신’(chapter 6). 힌두교의 경전인 Kaha Upanishad에서는 말하기를 자기Self를 의미하는 Atman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어떤 원인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하며, 불멸한다.’그러나 그 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것보다 위대한’존재이며 ‘가장 작은 것보다도 작은’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심장 안에 살아있다’. ‘각 사람의 자기self와 우주적인 자기Self는 마치 그림자와 빛처럼 심장 안에 살아있다’(Shree Purohit and Yeats 1937:30~31) 이와 같은 명확한 설명들은 초월성과 내재성은 신에 대한 선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들은 존재의 차원이다. 위에서 인용에서 시편기자는 내면성의 축과 초월성의 축을 피차 관계있는 것으로 놓고 있다. 마찬가지로 Winnicott은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서로 관계있는 것으로 놓고 있고 그 목적은 모두 같다. Winnicott가 그의 식대로 표현한 중간영역에서는 가장 상상력이 풍부하게 살아있는 세계이며, 그래서 시편기자는 보다 충만하게 깨닫게 되는 자신의 존재의 전체성을 지니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정신분석은 하나의 과정이며 영적 훈련이다. 게다가 내적인 진화의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다. 고전적인 이야기인 페르시아의 시인 <새들의 회의>Conference of the Birds가 12세기경에 Farid ud-din Attar에 의해 쓰였는데 그는 Sufi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이다. 그의 시는 Simurgh라고 불리우는 신비적인 존재를 만나러 가는 한 떼의 새들의 여행을 그리고 있다.
Simurgh는 명확하게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지는 않으나 그의 초월성은 절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주권자이며 완전한 위엄으로 감싸여 있다’(Attar 1961:12). 그는 수평선 너머에도 존재하기에 새들은 그를 갈망한다. 새들은 절망하면서 그들의 지도자인 hoopoe에게 말한다:

우리는 연약합니다...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마침내 Sublime Simurgh님께 다다를 수 있을까 요? 만일 우리가 그 분께 다다를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겠지요. 이 놀라운 존재에 대해 뭔가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처럼 눈이 감긴 자들은 그 신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위대한 존재와 우리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을 수 있다면 보다 쉽게 출발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자 hoopoe는 대답한다:

Simurgh 님이 자신을 분명히 보여주실 때에는..... 태양처럼 빛날 것이고, 땅 위에 수천개 의 그림자를 드리우실 것이다. 그가 자신의 빛을 이 그림자들에 드리우시면 수많은 새들 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새들은 단지 Simurgh님의 그림자 일 뿐이다.... 너희들이 이것을 이해할 때 너희는 Simurgh님과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Attar 1961:29~30)

수천마리의 새들이 길을 떠났지만 그 여행의 종착지에 다다른 새는 단지 서른 마리의 새였다. ‘Simurgh'의 문자적인 뜻은 ‘서른 마리 새들’이다. Attar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장엄한 태양이 그 빛을 비취자 이 서른 마리의 새들은(si-murgh) 바깥세상인 서로의 얼 굴을 서로 비춰주면서 내적 세계인 Simurgh의 얼굴을 묵상했다. 새들은 Simurgh를 응시 했을 때 그들은 Simurgh가 바로 거기에 참으로 있을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시 선을 돌렸을 때 그들 자신이 바로 Simurgh임을 보았다... Simurgh는 말했다 : ‘장엄한 태 양은 거울이다. 자기 자신을 보는 자는 거기서 자신의 영혼과 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보리라’
(Attar 1961:131~132)

알 수 없는 초월적 타자를 만나기 위한 여정에서 얻었던 것은 한 존재의 내적 상태로부터 또 다른 이의 존재의 내적 상태로의 여정이 드러난 것이다.
새들에게 그들 자신의 진실된 본성을 드러내 주는 거울로서 The Simurgh 는 프로이드의 묘사를 상기시켜 준다. 프로이드는 환자 자신이 그들 스스로를 볼 수 있도록 반영해주는 거울의 역할로서의 분석가를 묘사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종류의 억압에 대한 암시로부터 회복시키는 정신분석적 기법으로서 1912년 프로이드가 기록한 이래로 중요한 것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뭔가 다른 점이 진실로 남아있다. 예컨대 Andre Greeen(2002:50)은 정신분석적 주고받기는 ‘타자를 통해 되돌아감으로 인해 자기self로 돌아감을 성취하는 것’을 특징화하는 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새들의 회의’는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기록됐고, leitmotif와 같은 코란을 통해 ‘돌아감’return의 사상이 울려 퍼져나갔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을 만날 것이며 그에게로 가면 그들은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2:43)
.... 불행이 닥쳐올 때, 말하라 : 분명히 우리는 알라의 것입니다. 그리고 알라께로 가면 우리는 분명히 돌아갈 것입니다.
(2:152)
그리고 하늘에 있는 모든 만물과 땅에 있는 만물은 알라의 것입니다 : 그리고 알라께로 가면 만물은 돌아갈 것입니다.
(3:105)
태초에 주님이 그대를 부르셨듯이, 그대는 또한 돌아갈 것입니다.
(7:28)

Sufism은 ‘돌아감의 길’The Path of Return이라는 추종자들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의 한 양상은 외향적인 종교적 행동주의이며 육체적인 죽음을 통해서 물질세계를 창조하고 펼쳐나가는 외적인 신에게로 회복한다는 사상은 정신분석과 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들의 회의와 같은 작품은 모든 만물은 알라에게로 회복되며 또한 알라가 인간의 목에 흐르는 정맥보다도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외적으로 신성한 타자 안에 자신들을 소멸시키는 방식으로의 여행이 아닌 자기 자신들을 회복의 길로 , 즉 절대타자의 중재를 통해 자신들이 변형된 것을 인식함으로써 Simurgh 왕은 새들에게 나타난다.
영적 변형의 하나의 윤곽을 더 말한다면 그것은 유대적 영성의 신전Kabbalistic 전통에 나오는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이다. 이것은 열 개의 sephiroth 혹은 에너지의 중심을 명백히 보여주는 비범한 그림인데 인간 본성의 또 다른 요소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가에게 잠재적으로 흥미를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영적 전통보다도 정말로 대단히 정교하게 정신적 구조의 근거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전의 생명나무 역동에 있어서 정신적 변화의 정신분석적 개념화들을 비교하는 것은 매력적인 계획일 수 있다. 각 각의 중심의 다면체적인 의미들과 생명의 나무의 구조와 관련하여 서로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신전의 학생은 인간 존재에 대해 깊은 이해로 이끌려간다. 그 나무는 자체로 층을 만들 수 있는데,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 나무의 위쪽 절반과 아래쪽 절반은 사다리를 형성한다. 전통적으로 베델(창 28:12)에서의 야곱의 꿈에 등장하는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그런 사다리와 연결되어 있다. 전체로서의 이 사다리는 창조된 존재 전체를 드러내며, 이러한 전통은 Adam Kadman으로 알려져 있다. Adam Kadman은 성서에 나오는 아담을 반영하는데, 원래의 상태를 지닌 인간을 드러내고 야곱은 그 사다리 밑에 잠든다. 사다리의 꼭대기에서 생명의 나무로 나타난 영적 경험의 세계로 뚫고 나아가면서, 아담은 그의 잠재성의 실현에 의해 변형된다. 생명의 나무와 이미 언급한 그리스도교적인 전통, 즉 첫 번째 아담에서 죽었으나, ‘모두를 다시 살게 하는 ’두 번째 아담과 분명한 연결점이 있다.
이러한 모든 영적인 전통들을 훑어보면 첫째로 발전적인 운동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지닌 본래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고 변형의 과정을 거쳐 지속하고 있다. 두 번째로 대상에 대한 생각은 이러한 변형의 과정을 촉진한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정신분석학에서도 또한 핵심적인 개념들이다. 영적인 대상은 예수나 부처, 혹은 특정한 영적인 길, 경전 혹은 개인적인 교사와 같이 절대자의 전형들이 신성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있다. 대상과 과정은 분리될 수 없다. Winnicott은 중간 대상transitional object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말한다. ‘전이적이라는 것은 물론 대상이 아니다’(1971:14). 중간 대상은 하나의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발전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전이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상을 구성하는 발전하는 과정을 펼쳐가는 것이다(Parsons 2000:160~162). Christopher Bollas의 변형적 대상 개념은 같은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말한다. 초기 유아기에게 엄마는

축적된 내적 외적 변형들과 동일시 된 하나의 과정보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덜 중요하고 덜 동일시 될 수 있다.
(Bollas 1987:14)

영적인 대상은 유용하게 만들기 위해 요청된 변형적 과정에 의해 영적 대상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압축된 말이므로 이 말을 풀어보겠다. 주체는 발전적 운동의 어떤 종류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된 상태다. 우리는 아기 혹은 환자 혹은 영적인 길을 찾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길 할 수 있다. 발전하는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특별한 대상의 종류가 필요하다. 이 때 사람에게는 변형적 대상이 되는 잠재성이 있다. 우리는 엄마 혹은 분석가, 또는 내가 이미 언급한 영적 대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는 자신의 실존 속으로 이 대상을 불러야만 한다. 즉, 실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주체에게 의미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체는 자신을 위해 대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상은 바로 거기에 이미 있어야 한다. Winnicott의 말로, 이것이 중간 대상이다. 대상이 일단 의미 있는 존재로 불리워지면 전이적 과정이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위해서는 첫번째 지점에서 변형적 대상이 되는 것이 허락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영적 전통들은 자신만의 정체성들을 가지고 있고, 밑바닥에 있는 공통분모를 환원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아마도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의미의 원천에 사람들이 깊이 접촉할 수 있게 하는 작업으로 변형의 과정에 그들과 정신분석가 모두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정신분석에 대해 친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인생을 발전시키던 한 환자가 자신의 전문가적인 인생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요한 회의에서의 성공적인 발제라든가 혹은 그의 의견이 그의 분야에서 선도하는 의제로 채택되는 식의 에피소드들은 그에게 중요했다. 그는 그의 인생이 성공적이라고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일관되게 한 줄기로 흐르는 어떤 느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연속성의 느낌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고자 하는 거야’라는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되풀이되는 일이 그의 정서적인 삶에 있어서 진실한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 했다. 종교가 바로 이 남자 같은 사람 필요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신을 믿었을 것이고, 그것은 그에게 의미의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정신분석가는 이것이 내면의 갈등을 응시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했을 것이며 그의 반복된 이상화는 인생의 부분과 파편을 이루고 있는 양가감정을 회피하려고 애쓰는 한 그를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그 종교적인 사람은 인생의 불완전성을 수용하는 것에 동의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는 어떻게 이 사람이 추구하는 의미의 느낌이 제공 되는냐에 대해 묻는다. 정신분석가는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작업이 아니고 의미가 무엇이든지간에 환자가 자신을 위해 진실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의 작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것에 대한 그와 같은 토론을 뒤로 하고, 이 환자가 하는 일과 Attar의 시에서 어떻게 해서 자신들의 여행을 떠나는 새들 사이에는 그 어떤 유사점도 없는 점은 소중한 일이다. 사실 그 환자는 처음보다 멀리 나아갔다. 왜냐하면 치료자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그는 자신에 대해 물었기 때문이다. Attar의 새들은 여행에 대해 hoope에게 묻기 시작한다. 새들은 그 여행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들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행을 그만둘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이러한 질문들과 양해는 각각의 새들의 특성과 질을 드러내며 hoope는 그들의 어려움과 약함을 비춰주는 도움의 말을 조언과 교훈적인 이야기로 엮어서 대답한다. 정신분석가와 영적인 훈련 모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고백하고 싶지 않다는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고백’은 자신에게 조차도 매우 정신분석적인 개념이 아니다. 심지어 ‘회개’와 관련한 개념은 정신분석적 사고에 더 동떨어져 있다. 이런 생각들은 억압에의 복종, 행동에 대해 반 리비도적인 계율, 그리고 징벌적인 도덕적 초자아로서 내재화된 계율의 얼굴을 하고 있는 죄책감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전통적인 종교에 대해 왜 정신분석이 적대적이 되었는가를 확실하게 방향지어 주었다. 16세기 영국국교회가 William Tyndale이 영어로 번역한 성경을 용납할 수 없었던 이유는(이 문제로 그는 처형당했다) 그가 성경의 원전으로 돌아간데 있었다(Daniel 1989:xvi-xxi: 1994:93-100). Tyndale의 시대 '회개’라는 말이 라틴어 성경에서 보편적인 사용할 때 poenitentia-‘참회’penitence였는데 이는 고통, 벌, 보상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회는 백성들을 강력하게 도덕적인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 개념을 허락했다. Tyndale은 신약성서를 헬라어 원전을 가지고 번역했다. 라틴어로 poenientia는 헬라어로는 metanoia인데 이는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다. 그 뜻은 ’마음의 변화‘인데, 이는 잘못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 외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관점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3:2)라고 설교할 때, 그는 ‘ 네가 얼마나 나쁘고 악한지를 자백하라’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성 마태가 기록한 헬라어에서 그는 ‘너 자신에 대해 구별된 내적인 관점을 찾으라’는 뜻인 Metanoeite로 말하고 있었다. Meta는 변화를 뜻하며 따라붙는 -noia 와 -noeite의 어근은 ‘마음’을 뜻하는 -nous이다. ‘Paranoid'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있는 마음을 설명하는 말이다('para'-는 ’평행선‘이다). 그리고 nous는 영어로 들어오게 되면서 ‘상식’ 이란 말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적인 언어에서 nous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진실성의 본질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내적 지각의 능력을 뜻한다. 사도바울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12:2)라고 말할 때, 그는 정통한 용어를 명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헬라어로는 ’metamorphousthe te anakainosei tou nous' ‘nous를 새롭게 함으로써’인데 자기 기만으로부터 내적인 신실함을 구별해 내는 능력을 새롭게 함으로 존재의 변형을 의미하고 있다.
이슬람의 경우 아랍어로 ‘심장’을 뜻하는 galb라는 말이 정확하게 비교되는 말이다. Sufi에게 있어서 galb는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진실한 지각 능력이라는 뜻과 인간 존재의 심오한 깊이에 접촉하는 지점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구별하는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분석적인 환자와 영적인 길을 가는 수행자는 자신에 대한 깊어진 지식을 얻게 된다.
영적 수행과 정신분석 모두는 인식하기 불가능하는 것을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영적인 용어에 있어서 자신을 신성에 가까이 서려는 도(道), 아트만, 혹은 부처의 본성 같은 것들은 인간의 습관 혹은 존재의 자동적인 상태로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것임을 드러내 준다. 모든 전통은 새로운 영적 조건으로 향하는 변화의 길을 제공하고 있다. 그 새로운 영적 조건 안에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들의 발달이 성취 되어 질 수 있다. 마음으로 오는 근본법칙이 그 무엇이든지 명백하게 언급되든 되지 않든, 정신분석적인 상황은 환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 솔직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은 알게 된다. 분석적 과정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진실할 수 없다는 것을 수용하면서 시작되며 그들이 정직하려고 노력할 때 정직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숙고하면서 내적 정직성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정신분석가들은 ‘저항’과 환자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방어’에 대해서 말한다. 때때로 그러한 방어는 분석가의 작업에 반해서 죄와 같은 소리로 들리게 한다. '회개‘라는 말처럼 ‘죄’에 대한 신약성서 헬라어 원어의 뜻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처럼 비난할 범죄라는 뜻이 없다. 우리가 ‘죄’라고 알고 있는 Hamartanein은 사실상 ‘표적에서 벗어남’ 혹은 ‘과녁에서 빗나감’이란 뜻을 갖고 있다. 분석과정의 연민compassion은 환자가 불가피하게 분석에 대해 자기 방어를 할 때 그리고 필요에 의해 자기 검열을 할 때 인지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재 심리적 상태에 대해 진실해 질 수 있다. 방어를 포기하는 것은 지적이거나 정서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중단하는 일은 아니다. 자신에 대해서 신선한 인식을 내포하는 것이며 진실할 수 있는 보다 깊고 복잡한 종류로 방향 전환하는 새로운 신실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내적 정직함의 최전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스런 작업이기도 하다. 분석에 있어서 환자와 영적인 길에 있는 수행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욕망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애쓴다. 지속적으로 과녁에 빗나간 것을 더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방어적이고 또한 제한하는 기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전제를 포기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영적 전통의 한 전통에서 이러한 것은 참 자기 인식에 맞서는 ‘buffers’라고 알려져 있다(Mouravieff 1989~1993). 상실의 수용 혹은 더 자세히 말해서, 상실의 필요성necessity에 대한 수용이 내적 성장에 필수적이다.
Freud는 늑대 인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기함으로써 상실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새로 등장하는 자에 의해 제공되는 완전한 대체물의 제공 가능성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가 일단 취했던 리비도의 자리는 완강하게 보호되었다.
(Freud 1918:115)
모든 정신분석학인 혹은 영적인 성장은 어떤 것을 뒤에 남겨놓는 것과 존재하기에 익숙한 방식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들의 특정한 정체성의 발달은 우리가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Parsons 2000:81ff). 환자가 유행이 지난 혹은 실현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하면서 , 혹은 현실의 인기 안에서 자신에 대한 자기애적인 환상을 포기하도록 하면서 도울 수 있다:이것이 분석 작업의 재료다. 그러나 종교의 희생적인 측면- ‘육체에 대한 고행’-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기를 부정하는 자학의 형태로 볼 수도 있다. 극단적인 수행의 특정한 종류는 인격을 방해하거나 스스로 고문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모든 종교의 역사 속에서는 의심할 나위 없이 정신병리적인 예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이해의 외적이고 내적인 수준 사이에서의 이동은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Marion Milner(1937)의 정신분석적 자서전인 ‘여가 안에서의 실험’에서, 처음에 그녀는 기독교신앙 안에서 도덕주의와 그녀에게 명백해 보이는 마술적 사고에 대해서 갈등을 가졌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도덕적인 것이거나 누군가(하나님, 아버지)가 당신에게 대해서 기대하 기에 해야만 하는 그 무엇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생각을 위한 실천적 원리나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한 사실들의 이해를 위한 핸드북과 관련이 있다.
(Milner 1937:137)

그녀는 한 사람의 자신의 선입견적인 가정들과 그 가정들에 기초한 의도들을 포기하는 의미에서의 내적 희생은 오직 창조적인 정신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의 힘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 하나는 본질 에 과정을 지닌 실제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에 일으키는 그 피 희생에 공감적으로 참여 한 모든 사람에게 피의 희생 능력 안에서 실제적인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마술적 믿음 대한 생존에 근거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내적 실제가 인 식될 수 있는 그 조건 아래서만, 아주 엄청나게 중요한 인간성에 대한 내적 과정에 대 한 최고 시적인 정점 드라마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Milner 1937:139)

부활절은 십자가와 부활의 계절이다. 교회의 부활절 찬송의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전이에 기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절기를 지킵시다’(고전 5:8) ‘성실’이란 말은 세상에서 쓰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숭고한 문맥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 단어가 흡사하게도 뜻밖의 모습으로 쓰이는 또 다른 사회문화적인 배경이 있다. 일본 무술의 지도자에게 합기도나 검도 수련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그는 아마도 ‘힘’ ‘속도’ 혹은 ‘판단력’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성실’이라도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일본 makoto개념이다. 그것은 단지 당신이 사용하는 의미인 성실한 존재라든가 가능한 사실적인 진실한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참된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으로서 영적인 순수성을 지닌 것으로 말과 행동이 동시에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무도의 수련생은 한 인간으로의 하나의 체현(體現)embodiment을 위해 수련해야만 한다. 헬라어로 ‘성실’은 부활절 찬송에서 인용되는 성서적인 구절이기도 한데, ‘elikrineia'이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섞이지 않은‘ 혹은 ’물을 타지 않은‘ 존재의 질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두 개의 문맥에서 볼 때 성실이란 진실한 자기지각으로부터 나오는 동기의 투명함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다시 정신분석학적 과정이 역시 매우 많이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있다. 대부분 매일 매일 이어지는 정신분석의 작업은 깊은 차원에서 길을 찾아내면서 혼란스러운 것을 명료화하는 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위선적인 것은 회피할 수 없다. 무도 지도자의 복합적인 기술은 다년간에 걸친 세부적이고 정교한 수련으로 얻어진 것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성실은 간결하고(꾸밈없고) 명백한 것이다. 그 어떤 개인에의 경우에 있어서도 분석 작업의 수많은 항목은 한 사람의 정서적으로 풍부하고 복잡한 내적 상태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 말한 명료함과 간결함을 지니고 있을 때에 한해서 그렇다.
일본 무도의 배경에는 선불교가 있다. 선종의 고전적인 책의 하나는 13세기 Dogen이 쓴 Shobogenzo인데 그는 책에서 말한다: ‘부처의 길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데 있다’(Nishiyama and Srivens 1975:17). 또 다른 선생으로부터 무엇으로 도를 이룰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배고플 때는 먹으라. 피곤할 때는 자라’. 핵심은 그와 같은 똑바른 간결함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상화, 투사, 그리고 방어적인 환상에 의해 방해받지 않으면서 마음으로부터 자발적으로 흘러나온다면 의미로 충만할 수 있느냐이다(선종에서 의미는 Sufi에서의 galb와 같다). 꼭 같은 통찰이 서양의 영성에서도 나타나는데 18세기 프랑스 제수이트회 수사 Jean-Pierre de Caussade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영어 제목으로는 ‘현재 순간의 성례전’ The Sacrament of the Present Moment이라는 유명한 신비주의적 논문의 저자다(de Caussade 1981). 영적 삶에서 진보를 위한 그의 조언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지니고 있는 그대로 두면서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의미를 강요함이 없이 혹은 현재 순간이 요구하는 것을 단순하게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기대기 위하여 그들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삶의 과제를 자기 자신의 길에 두는 것이다. de Caussade는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수용에 대한 그 자신의 기독교적인 언어로 사용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는 말한다. ‘배고플 때는 먹어라. 피곤할 때는 잠자라’
그와 같은 간결함은 모든 종류의 습관적인 애착 즉 물질적인 것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고 방식 그리고 특히 자신과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사고 방식들에 대한 애착을 포기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정신분석 과정에서 환자에 대해 똑같이 요청되는 것이다(마찬가지로 분석가에게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질문하고 그들 스스로에 관하여 생각하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포기하는 것에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들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만약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하는 투쟁에 의해 내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포기할 수 있다면 정신분석에서 임상적 이론의 필요한 복잡성들은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이 자신이 진정으로 존재하고 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게 된다.
정신분석은 종교적 사유를 낳는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며 종교적 사유를 회피하는데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군가 종교에 흥미를 느끼거나 적대적이거나 혹은 단순히 종교에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하면, 분석가는 흥미 혹은 반대 혹은 장벽이 그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뜻한다는 데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 의미는 가능한 한 충분히 이해되어야만 한다. 만약에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이 종교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얽혀 있는 내적으로부터 기인하는 얽혀 있는 거절이 되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관심이 종교적 경험의 지속 그 자체에 있다면, 그들 스스로에 있는 더 큰 우주universe가 발견될 수 있으며, 종교적으로 보다 큰 자세는 우주cosmos와 관련을 맺을 수 있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2011-07-20 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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