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실 | 소논문
 
jboard

제      목 :
  언어이전의 경험과 종교적 직관
이      름 :
  김호임
홈페이지 :
  
첨부화일1 :
첨부화일 : 언어이전의 경험과 종교적 직관.hwp (90624 Bytes) 언어이전의 경험과 종교적 직관.hwp (90624 Bytes)

정신분석과 종교 발제물

언어이전의 경험과 종교적 직관 - Kenneth Wright

번역: 김호임

언어 이전의 경험과 종교적 직관
내 침묵이 비명을 지를 때
아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루이스 맥니스

보라 : 머리타락 한 올, 눈썹 하나, 속눈썹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신다.
: 모든 머리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세고 계신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
P.173
종교, 법, 그리고 아버지

이 장에서 나는 종교적 경험의 뿌리가 언어 이전의 self의 핵심에 놓여있다는 개념에 대해 탐험하려 한다. 나는 논의할 것이다, 발달 과정에서 배제되어 온 self의 요소들에게 종교가 인식과 담아주기에 대한 약속을 제공해 준다는 것과, 셀프가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서 담아주기를 위한 욕구(need)에 의해, 그리고 또 담아주는 대상을 갈망함으로써 종교적 탐색이 불타오른다는 점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결국 나는 그렇게 규정지어진 종교적 과정이 인격(personality) 안에 있는 프로이드가 묘사한 리비도의 축(에로스)과는 종류가 다른 사랑의 축(아가페, 부드러움-tenderness)의 한 부분이라고 보여주고 싶다.
이런 주장들을 만듦에 있어서, 나는 종교 영역에 제한하지 않고 정신분석적 이론(가설)의 무시된 영역으로 주의를 끌기 원한다. 프로이드 자신도 종교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의 시각은 꽤 부정적이었다. 그의 통찰력(종교에 대한)은 주로 사람이 부모 대상(figure)에게 거리낌 없이 의존하는 의존성과 관련이 있었으며, 그는 이것이 모든 능력을 가진 신(Freud, 1927,1930)에 대한 믿음을 유발하게 하는 강한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이라고 믿었다.
P.174
그가 살던 시대의 가부장적인 가치를 어느 정도 반향 하면서, 프로이드는 이것(의존성)을 발달의 실패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이‘(장성한) 사람이 되는’본질이라고 했던(고린도 전서) 사도 바울에게 동의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관점들이 프로이드 자신이 만든 구조에 의해 억제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많이 인식되어 지고 있다. 그가 인격의 그러한 부분들이 아버지라는 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그 유산에 방향을 두고 있다고 탁월하게 설명해 준 반면에, 그의 전오디푸스 콤플렉스, 모성 축에 관해서 공식화 하는 일은 아주 미흡했다. 인격과 관련된 이론을 논쟁하는 데는 이안 써티(Suttie 1935)가 앞서갔는데, 그는 프로이드가 종교에 관해 평가한 것 말고도 프로이드의 이론상의 작업 전체가 그의 구조에 있어서 반(anti) 모성편향 때문에 비뚤어져 있다고 주장했다.(Suttie 1935)
써티는 프로이드가 oceanic feeling을 정의하는데 어려워했고, 그가 사랑과 부드러움을 성적인 본능으로부터 이끌어낸 것을 기록하면서, 프로이드가 자기 어머니와의 초기 관계에 대하여 무지했든지, 혹은 그것을 억제했든지 이로 인해 형성된 프로이드의 인격에서 부드러움이 터부시 된 것을 자명한 일로 가정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볼비의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을 예시한다. 써티는 아기가 ‘엄마를 향한 단순한 애착’그리고 엄마와의 접촉과 교제(companionship)에 대한 기초적인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제안했다. 그는 부드러움을 느끼는 것은 초기 모체로부터 발달했다고 보았고 적어도 프로이드가 직시한 대로 성적욕구나 본능과는 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프로이드의 인격이 아버지 계통에 따라서 조직화 된 것(Wright 1991)은 그가 모세라는 인물에 대해 매력을 가진 것으로 더 증명되었다. 프로이드는 유대인들의 ‘아버지’에 대해 장황하게 기록 했고, 미켈란젤로의 모세 조각상-돌판에 새겨진 율법과 함께 있는-에 매료되었다. 이 힘 있는 조각상은, 모세가 하나님의 손으로 새겨진 두 돌 판을 가지고 시내 산을 내려와서, 자기 백성이 이방인이 섬기는 금송아지한테 예배하는 것을 발견한 후 분노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프로이드 역시 자기 서클 중에 자기와 다른 이론-가짜신-을 형성하려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어했다. 참으로 그는 그의 발견 중에서 아버지의 ’진실’을 보존하는 일을 좋았는데, 이것은 어머니를 정신분석적 사고에 투입시키기까지 두 세대가 걸리도록 했다. 그 결과로써 종교에 대한 관점들이 아버지 살해 충동, 근친상간의 죄, 속죄, 마침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는 것 등 오이디푸스 단계적 이해에 고정되어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격 측면에 더하여 19세기 말에는 이러한 구조물들이 잘 들어맞게 보인다. 이미 알려져 있는 아버지 정신뿐 아니라 유대- 기독교 전통 자제가 아버지 쪽으로 무게가 실려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선택한 민족을 지배하는 아버지였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의 특성 들 중의 많은 부분을 물려받았다. :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 가부장적 사회 내에서 종교의 기능을 하늘-아버지 (예를 보기 바람. 써티1935:ch.9)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반복해서 진술되어 있듯이 아버지 법을 따르는 것으로 보는 일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P.175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해서는 안 되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안되는 지를 규정하는 사람은 아버지이다. 역사적으로, 발달적으로 그러한 법이 외부의 아버지상과의 관계에서 내면화하며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면, 대상이 잘 되는 일은 이 아버지 원상(imago)과의 연결에 더욱 더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내부 조직화와 같은 감정적 일이 죄와 벌과 같은 것이든지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용서와 받아들임이든지 여전히 주요 인물은 아버지이다. 이 이야기에서 회상할 수 있는데, 돌아온 아들은 말하길 ‘아버지 , 제가 하늘과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 돌아온 아들을 환영해주면서 아버지는 ‘나의 아들아.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구나.’(누가 복음)
내가 묘사한 이 중복되는 극본들은 가부장적 사회(19세기와 20세기 초, 비엔나)와 가부장적 종교( 유대-기독교 전통)와 종교의 가부장적 이론을 포함한 정신분석의 가부장적 이론을 나타낸다. 거기에 자기 사회의 법규와 자기 아버지를 반대하여 반란을 꾀한 한 아들이(프로이드)있다. 그리고 한 이론이 있는데 이 이론은 그런 반란의 많은 면모들을 자세히 설명한다.(오이디푸스 이론):그리고 새 가부장제도(정신분석)을 위해서 자신을 권위의 망토로 고용한 바로 그 아들은 이것(가부장제)을 믿는 것이 순수하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모세처럼 노력하고 있다. 가부장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종종 이 반란의 아들이 독재적인 아버지가 된다.

사랑, 부드러움, 모성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에 대한 반란은 당시 학파(조류)로부터 일찍이 축출을 이끌었는데, 그 예로 융과 아들러의 중요한 논쟁들, 그리고 프로이드가 죽은 다음에 비로소 보이는 ‘모성적인’ 페렌치(Ferenczi) 가 있으며, 유아 발달에서 엄마의 역할에 대하여 창조적인 이론화를 급증하도록 이끌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영국학계의 멜라니 클라인, Michael and Enid Balint, 도날드 위니캇, 미국의 Harold Searles, Heinz Kohut, 그 뒤를 이어가는 자기심리학의 주창자들은 모두 아버지 편향에 반대하는 ‘항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프로이드의 ‘rule’의 기간 동안 무엇이 간과되어 왔는지 이야기 했고, 제외되었던 모성을 이론과 실제에 회복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모성에 대한 개정은 다른 형태들을 가진다. 예를 들어, 페렌치의 아이디어는 치료적 관계를 고려했다.– 환자를 치료했던 것은 분석자의 사랑이었다(Ferenczi 1926)는 것이다. 이 주제는 Michael and Enid Balint 를 거쳐 위니캇에 대한 연구와 영국 정신분석 협회의 당대의 독립그룹에 계속되었다. 발달 과정을 형성하게 하는 것은 환경과 보호, 실제 엄마의 받아주는 행동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Kleinian의 개정은 본능과 환상(phantasy)- 이 환상이 전체 모성적 틀에서 자리 잡는 한- 본능과 환상에 우위를 두었다.
P.176
이렇게 다른 시각 사이에서 존재하는 긴장감은 영국 정신분석 발달에 주요하게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이것은 유아의 공격성을 이해하는 방법에서 보여질 수 있다. Klein을 따르는 사람들은 유아의 본래 타고난 공격성에 강조를 두는 반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나쁜 것일 것이다 -, Ferenczi파 사람들은 공격성을 반응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모성 혹은 환경적 실패 보다 2차적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써티의 입장을 가까이서 보면, 강조되는 것은 아기의 사랑받고자 하는 본래 타고난 성향이다.– 아기는 환경이 과도하게 실패하지 않은 한도에서 우세하게 되는 원래의’선한 것’을 부여받았다.
이 장에서 나는 이‘보다 부드러운’모성적 전통 내로부터 이론화하고자 한다. 나는 ‘사랑’이 처음부터 있었던 존재한 어떤 감각이라고 주장할 것이고, 실제적이고 자세한 방법으로 이 사랑의 자연성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첫째로 처음부터 종교에 관한 정신분석적 사고에 끈질기게 따라다닌 한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고 싶다. 이것은 사랑이 압도적으로 남자, 아버지의 틀에 국한되어 해석되어져 온 방식이다.
종교는 적어도 상위형태에서는(higher forms, Symington 1994) 사랑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랑은 원래 부성적인 것-법을 사랑하는 것- 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내가 ‘모성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이다. 부성적 종교는 법을 (예를 들면 십계명) 통치하기 위한 최고의 것으로 삼기 원한다. 예수는, 모성적 변호자에 가까웠는데, 법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 대한 감정적인 사랑으로 대치하길 원했다. 참으로 예수님의 가장 강한 어떤 말씀들은 법의 글자대로 살아갔던 서기관들과 바리새파사람들을 반대했던 내용들이다. 그리고 그는 벌을 요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감정적인 이해를 제안함으로써 전통적인‘아버지들’에 대해 충격과 분노를 나타내셨다. 그 한 예는 간음죄로 잡혀온 여자에 대한 접근방법이 될 것이다.: 먼저 그 사람과 동일시하고 그 다음에 재판하는 것. 예수님은 이같이 에로틱하고 욕정에 가득 찬 사랑보다는 동일시에 바탕을 둔 사랑에 더 관심이 있었다.:“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그는 말하길, 우리 중에 누구든지 이 여인의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 모두가 간음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신분석에 문제를 일으켜온 것은 바로 이타적인 사랑(아가페)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만약 그러한 사랑을 우선적으로 에로틱하며 자기를 찾는(에로스, 목표가 억제된 성욕)뿌리로부터 이끌어 낸다면, 어떻게 이 사랑이 진정으로 타인을 향할 수 있는가? 만약 아가페가 단지 자기를 찾는 에로스의 전초기지라면 아가페가 어떻게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겠는가?
써티의 대답은 명료하다.: 이것은 교정을 필요로 하는 이론 –정신분석적이론이다.- 왜냐하면 프로이드의 인성(부드러움에 대한 금기)의 왜곡된 반(反) 모성적 경향과 함께하고 있기 떄문이다. 만약 사람이 자기 직관에 귀를 기울였다면 문제는 간단히 사라졌을 것이다. (아기에게) 최초로 주어진 것은 엄마와의 접촉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요구이다. 이 요구 위에 사랑의 돌보는 측면이 세워지는 것은 분명하다.
종교적인 사랑은 이제 처음부터 존재했던 발달 선상에서 꽃피는 것으로 보여진다. 써티(1935)의 분리된 관계적 축(separate relational axis)에 대한 관점은 Bowlby의 나중 작업에서 충분히 확인되어졌고(Bowlby1969), 이러한 더 경험적인 골격 안에서, 이타적인 사랑 혹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기초에 대한 이론적인 해석이 초기의 엄마-유아간의 결합위에 존재하고 있다.
P.177
제도화된 계시 종교

Symington(1993)은 종교와 정신분석에 대한 짧은 기사에서 종교들을 두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누었다. ‘계시종교’는 거의 제도화 되었고 법에 의해 정해진 믿음과 종교적인 관습이 부과된 것이다. 이 종교들은 내가 가부장적이라고 표현했던 종교적인 타입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러나 Symington은 ‘자연종교’라고 부르는 또 다른 중요한 그룹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 가운데 그는 소트라테스와 부처의 가르침, 그리고 적어도 예수의 가르침의 일부분을 두었다. 그에 따르면, 이 자연종교는 법의 글자와 종교적인 관습의 일치에 관계가 있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미와 관련하여 할 수 있는 내적 질문들과 관련이 있다.: 어떻게 인간이 충족(fulfilment)을 찾을 것인가? 어떻게 개개인이 자기 삶에서 진정한 만족(satisfaction)을 찾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좀 더 주관적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법에 따라서 죄를 지었나 안 지었나 하는 질문 못지않게 실제적이며, 객관적 증거 보다는 내적 인간의(inner person)의 직관적인 평가와 연관이 있다. 그래서 이 접근 하에서, 하나의 행동과 생각이 바르게 느껴진다고(feel right)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내적 기준에 관계해서 들어맞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행동 혹은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느껴진다고(feel wrong) 말할 수 있는 것은 내적 불일치의 감각을 창조하거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들은 객관적인 규칙보다는 내적 기준, 그리고 직관에 따라서 만들어짐이 분명하다.
판단의 내적 기준이나 마음의 내적 상태들에 중요성을 둠에 따라 자연종교는 계시종교보다 자기 자신의 안녕(well-being)에 더 큰 중요성을 둔다. 그리고 이것은 엄마의 축 둘레를 구조화 하는 일을 제안한다. 가부장적인 종교와 비교했을 때, 이 종교들은 ‘저쪽 편’에 관심이 있던 오이디푸스 시기의 가치들인 객관적인 사실과 객관적인 옳고 그른 것과는 덜 연관되어 있다. 자연종교는 주관적인 사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 바르고 그릇된 것인지에 관해 직관과 감정적인 평가(appraisal)–에 관련이 있다.– 전오디푸스 시기의 모성적 가치와 연관되어 있는. 성인 시절에 주관은 이러한 평가들을 만들어낸다: 인생의 시작점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이 그 또는 그녀를 위해서 그 평가들을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아주 확실하게도 이러한 돌보는 방식으로 자신을 (self) 처음부터 보살펴 준 사람은 아기를 위해서 이러한 평가들을 만들고 있는 엄마였다.
이 장에서, 나의 관심은 자기 평가와 개인적인 경험을 최고로 여기는 Symington의 두 번째 종교 그룹에 있다. 그렇지만 계시종교가 개인적인 주관적 비전과 함께 시작하며, 단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지배 그룹(아버지의)과 주어진 제도화된 형태(외부의)에 의해서 이것이 제멋대로 사용되어졌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Martin Buber(1973)가 지적했듯이 제도화의 과정은 결과적으로 주관적 비전–신 혹은 종교에 대한–과의 접촉에 손실을 이끈다. 그리고 이것이 일어났을 때, 종교는 외적인 것을 엄수하는 일로 약화되게 된다. 그러나, 신성함을 향한 더 깊숙한 돌파구와 함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될 수 있으며, 바로 이 시점에서 종교는 영적으로 회복되어진다. 부버(1937)의 설명은 종교의 근원(fons et origo)이 언제나 개인적인 종교적인 경험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게 한다.
p.178
의미 있는(중요한) 순간들, 언어 이전의 경험과 종교성

세계적인 큰 종교들이 몇몇의 중요한 개인들의 통찰력에 바탕을 두어 온 반면 신성함에 대한 직관은 평범한 경험의 영역 내로 내려간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일상의 바깥 순간, 세계가 혹은 그 일부가 다른 방식으로 빛나게 될 때 그 순간을 의미 있는(중요한)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순간들의 질은 어떤 이의 한 줄의 시나 음악작품을 생각할 때 이해가 될 수 있다. 첫 접촉은 의미로 충만하다.- 척추를 따라 진동이 내려오며, 심장은 고동을 멈춘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감동은 단지 표시일 뿐이다.:주관적으로, 느낌은 인지와 표현되어진 것 중의 하나이며 – 시나 혹은 음악 한 소절은 주체의 영혼의 한 부분에게 ‘말하고’또는‘노래한다.’거기에는 확인의 느낌과 그 순간이 가버리기를 꺼려하는 느낌이 있다.:‘이 아름다운 형태는 내가 항상 바래왔던 것이다! 그것은 거의 나의 일부이다!’
이와 유사한 순간들은 한 사람의 자연세계와의 관련에서 강조될 수 있다. 한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며 그것과 접촉하는 것을 즐길 것이다. : 그러나 때때로, 다른 경험이 있다.– 바다경치나 멀리보이는 언덕 혹은 사막의 쌓여 있는 모래언덕으로부터 특별한 방법으로 충격(인상)을 받는 감각과 같은. 그렇다면 경험된 것들은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epiphany이다.(epiphany- 신 현현, 갑작스런 통찰력으로 이해하는 순간) : 주체는 시나 음악의 작품의 일부들로 인해 그랬던 것처럼 형태들을 통하여 살아있음에 대한 감각과 자연 풍경과 하나가 되는 감각을 가지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경험은 창조적인 충동과 자연풍경을 잡으려는 예술가들의 필요나, 혹은 오히려 그들의 매개체의 형태들 내에서 그것에 대한 그들의 비전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그랗게 함으로써 의미있는 순간을 더욱 ‘실제적’이고 그들에게 더욱더 유용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평범한 경험들을 종교적인 경험과 명쾌하게 연결시킨다는 것은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나는 마음을 붙잡는 아주 작은-순간들과 마침내 인류를 움직이게 하는 거대한 비전들 사이에 어떤 연속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잠재되어 있는 사건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경우에, 모양 인지 능력에 의해 창조되었거나, 혹은 예술가의 기술에 의해 재창조되어진 외부의 한 형태가 아직 형태화되지 않은 self의 한 부분, 다시 말해 그 순간에 있었던 일종의 존재와 공명을 이룬다. 어떤 한 존재에게 그 순간 줌으로써 한 부분의 self와 공명을 이룬다. 보는 이의 눈에서‘형태를 가지는’자연경관은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어진 형태,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적인‘형태들’, 이 각각의 형태들은 한 ‘마음의 고향(home)’이나 한 ‘형태’를 self에게 제공해 주며, 동시에 그것의 풍부한 경험을 제공해 준다. 각각의 경우에, 발견되어진 혹은 창조되어진 형태(외부의)와 주체의 자연성(본성, 내부의)속의 깊은 어떤 것 사이에 접촉이 있다.:‘self’(세속적인) 또는 ‘soul’( 종교적인)은 이러한 순간들 가운데서 외부적인 인식 혹은 울림을 발견한다.
이러한 순간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평범 그 이상의 것이 주목되어진다.–이들은(이러한 순간들)은 요구되는 즉시 앞으로 불려 질 수 없다. 놀라움의 감각은 항상 있고, 주로 은혜의 감각, 어떤 특별한 것을 위해 어떤 면에서‘선택되어져’온 감각이 있다. 예를 들어, 종교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처럼 어떤 이가 종교적인 것들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순간이 일어날 수 있다. 또는 이것은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것을 향해 이끌리는 갈구의 결과일 수 있다.– 종교적인 책을 읽는 것, 예배 처소를 찾는 것 등이다.
P 179
그러나 그 순간이 올게 될 때(만약 오게 된다면), 이것은 항상 놀라움이며, 개인적이고 독특하게 느껴진다.: 어떤 특별한 형태– 종교적, 예술적, 혹은 자연적인(본성적인)- 는 주체를 부여잡고 휘저으며, 그를 만진다. 관계성과 인식은 경험의 필수적인 특징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경험들의 말로 표현되지 않는 자연성(본성)이다.- 이 경험들은 좀처럼 단어를 통해 묵상되어지지 않으며 묘사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그 경험들은 형태가 없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을 형성해가는 지각적인 형태는 이것의 본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말러가 그의 음악을 찬양하는 어떤 사람에게 그의 작품 중의 하나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마담, 내가 말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표현할 수 있었더라면 음악으로 작곡하지 않았을 거요’라고 답변했다. 그러므로 의미 있는 것은 그 형태 자체 안에 거한다. 그리고 이 형태는 의미 있는 순간들과 함께 하기에- 그 순간이 다가와서, 그것의 효과를 가지며, 떠난다. 그러나 담아주는 형태(containing form)와 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Josephine Klein(2004)의 정신분석치료와 형언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책에서 몇 가지 예들이 내가 묘사한 어떤 특징들을 설명해준다. 첫 번째 두 예는 특별히 경험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본성에 대하여 표현했고; 세 번째는 어떻게 이것이 감각 형태들(예:말로 표현 안되는)의 종합체 안에서 그리고 그 감각 형태들에 의해서 묵상되어지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법열(high exaltation)의 황홀함 후에 적은 몇 구절들’에서

인간이 무(無)를 알게 하는 선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thought)로 지식을 전달함.

그리고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그녀의 신비스러운 경험들 중의 하나를 쓰면서 의사소통적인 지식의 부족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어떤 감각도 없지만 즐기는 것은 있다. 무엇이 즐거운지에 대한 어떠한 지식이 없이도. 영혼은 모든 좋은 것을 다 같이 포함하고 있는 어떤 좋은 것을 즐기고 있다고 깨닫고 있다. 하지만 이 좋은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아빌라의 성 데레사, 거룩한 어머니 데레사의 삶, ch.ⅩⅩⅠ, italics mine)

마지막으로 좀 더 세속적인 예가 있는데 이 예문 안에는 작가가 경험의 어떤 최소한의 질적인 것을 시적인 언어로 전달하기 위해 그녀의 재주를 사용하고 있다.

해가 지는 오후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 중의 하나인 밤 줍기에 몰두하고 있다. 나는 잎이 넓고 무성하며, 나를 보호해주는 나무 아래서 혼자 놀고 있다. 나의 엄마는 옆 벤치에 앉아서 내 여동생이 잠들어있는 유모차를 흔들고 있다…내가 불그스레한 갈색 밤을 줍는데 갑자기 따뜻한 밤 껍질을 통해 심장 고동과 같은 고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 고동은 또한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도 있고, 마치 생명의 피가 돌 듯 모든 것이 고동을 치며 흔들린다. 나무 아래에서 몸을 구부리며, 나는 내 손 안에 생명을 쥐고 있다. 그리고 나는 조화롭고 진동하는 투명성 한 가운데 있다. 그 순간 동안 나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안다. 나는 완전함의 한 가운데로 비틀거리며 간다. 그리고 나는 내 지식의 지식이 나한테서 도망가기 전에 내 자신을 충족감(fulfilment)으로 계속 붙들고 있다.
(호프만 1989:41-42)

P.180
종교적인 경험과 심미적인 순간 그리고 모성적 담아주기

만약 이와 같은 종류의 경험들이 참으로 비언어적 형태의‘언어’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리고 내가 제안해 왔던 대로 그것들(경험들)이 총체적으로 모성적인 것에 가까운 종교적 범위에 속해있다면, 그것들(경험들)을 언어 이전 시기의 원형적인 경험들과 연결시키는 일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Cristopher Bollas가 unknown thought( Bollas 1987)에 관한 그의 작업에서 해놓은 것이다. 내가 말한 ‘ 의미있는 순간들’을 그는‘심미적인 순간들’이란 용어를 썼다.

어떤 사람이 한 경험에 의해 자신이 요람부터 함께 살아왔던 절대적인 확실성에 그 영혼, 소리 없는 인식의 만남에 흔들림을 받았을 때... (그러한 순간들)은 근본적으로 말없는 상황들인데, 주체의 느낌의 농도가 두드러지며, 또 그러한 순간들은 근본적으로 심미적인 대상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표현 없는 지식이다.( Bollas 1987:30-31)

Bollas에게는, 그러한 모든‘심미적인 순간들’은 초기 경험을 다시 체험하는 것이다.

시나 작곡, 그림 혹은 그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어떠한 대상이든지 그것에 의해 사로잡혀지는 신비한 즐거움은 유아의 내적 세계가 부분적으로 엄마에 의해 형성되었을 때 그러한 순간들에 기초를 둔다. 아기가 그것들을 엄마의 도움(coverage)없이는 연결시키거나 모양을 형성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볼라스 1987:32)

이들(심미적인 순간들)은 Bollas가 변형의 순간들이라고 불렀던 것의 부흥을 구성한다. 이것은 엄마의 아기를 돌보는 평범한 감각의 일들을 통해 엄마에 의해서 야기되어진 것이다. 엄마는 고통스런 배고픔을 편안한 상황으로 변형시킬 뿐 아니라, 기저귀를 갈아 주고, 아기가 등을 돌릴 수 있도록 하며, 미소를 짓고 이야기하며, 속삭여 준다. 볼라스는 그러한 경험들을 엄마가 분리된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이전부터라고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엄마의 외관들은 환영 같은 것이며(볼라스 1987:33), 그리고 각각은 유아의 상태에 있어 의미 있고 환영할 만한 변화를 알린다. 그러나 볼라스에게 그것은 엄마가 하는 일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는 특별한 방법도 유아 경험의 부분에 포함된다. 무엇을 하는지 뿐만 아니라, 유아경험의 부분이 되는 엄마의 특별한 방법도 포함된다. 엄마의‘돌봄의 idiom’(개성적인 특징?), 그는 이것을 그렇게 부르는데, 이것은 아기의 첫 심미적인 것이 된다. 안아주고, 존재하고, 관계하는 패턴은 유아의 정신신체의 상태를 중요하게 변형시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P181
변형되어가는 유아의 경험이 엄마의 심미적인 것에 따라 유아가 변형되어가는 실제적인 것과 나란히(같이), 아기는 엄마의 의사소통들의 내용뿐 아니라 그들의 형태를 흡수한다. 삶의 시작 시기에 유아를 다루는 일은 의사소통의 기본적이 방식이며 그래서 엄마의 형태(그녀의 심미적인 것)를 내재화하는 일은 엄마의 언어적인 메시지를 내재화하는 것보다 선행된다.

볼라스에게는, 심미적인 순간은 독특한 엄마의 패턴을 가지고 변형하는 순간을 재창조한다. 초기 순간이 현재의 지각되어진 모양 안에서 엿보여지고 재구체화 된다. 그래서 심미적인 순간은 엄마의 안아주기를 상징적으로 기억하도록 다시 이끌어지는 감각, 언어이전의 기억의 돌입을 구성한다.
볼라스는 자기가 쓰는 언어가 종교적인 표현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그가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 종교적 반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손한, 간청하는, 탄원, 수송되는, 신비한 과 같은 단어들을 그는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sacred’(성스러운)이라는 단어는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제일 초기의 경험에 대하여 다룰 때 가장 근접한 단어이다.:그는 말하기를 ‘Sacred’는 ‘모성적인 것보다 우선하다.’

모성적 형태의 공급으로서의 변형

볼라스의 개념들은 위니캇의 환경적 엄마–이 용어는 엄마의 받아주는 반응들에 의해 유아발달을 촉진하게 하는 전-대상 엄마에 관해 사용했던 용어- 의 작업을 좀 더 창의적으로 확장시킨 것들이다. 이 영역에서 위니캇의 작업은 잘 알려져 있다.하지만 이것은 내가 보는 견해로는, 볼라스의 형성들에서 비교적 덜 중요하게 다루어진 어떤 면을 강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비록 그는 엄마를 유아의 내적 세계에게 ‘주는 형태’로서의 엄마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볼라스 1987), 강조점은 아기의 경험에서 엄마의 변형에 있다. 그와 반면, 위니캇은 엄마의 역할을 형태들의 제공자로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위니캇의 표현들 중의 단지 하나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이 생각은‘초기 창조성’,‘중간대상’에서의 그의 개념들을 함축하는 것이며, 그의 엄마 얼굴의 거울 역할에 대한 나중작업에서 더 깊이 함축되어 있다.(위니캇 1951.1967b)
초기 창조성(Primary Creativity)은 엄마가, 아기가 어떤 경험을 완성하길 필요로 하는 ‘형태’를 제공할 때 아기의 경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위니캇의 방식이다. 그 sequence는 ‘아기’의 젖가슴에 대한 기대이며, 특히 자극(흥분)과 특별함 둘 다 관한 기대 : -‘엄마의’의 젖가슴 공급 -특히‘시간 맞추기’와 ‘주는 방식’. 이 두 가지가 충분히 함께 올 때(아기의 기대와 엄마의 대답하는‘형태’) 아기는 자기가 젖가슴을 창조했다고 느낄 수 있다.: 엄마가 반응하는‘형태’(form)는 유아가 기대하는 ‘모양’(shape)과 잘 매치되었다. 엄마가 이러한 경험을 허용해 준 사실이 유아로 하여금 이것을 바탕으로 더 세워가도록, 또 나중에 유아가 자기 경험의 여러 면들에 적응하는(구체화하는) 자신의 형태들을 찾을 수 있게 /창조할 수 있도록 가능케 한다. 위니캇에게‘증간대상’이란 아기가 갖는 이런 종류의 첫 성취감을 말한다. – 어떤 감각적 형태가 작은 이불 조각의 질에서 발견되는데
P.182
유아는 이것을 엄마의 경험을 재창조하고 구체화하기를 필요로 할 때 사용하고 있다. 이 와 같은 방식으로 아기는 엄마가 없음에도 엄마의 현존을 불러들일 수 있다.– 이것은 초기 상상적인 경험이다. 위니캇의 나중 논문에서, 그는 이러한 초기 창조성으로부터 상상적인 환상에 기초를 대부분 두고 있는 문화, 이 큰 문화적인 세계(종교를 포함하여)에까지 direct line을 제안했다.
중간 현상에 관한 그의 작업에서 위니캇은 유아경험을 위해 엄마에 의해 제공되어진 아주 중요한 형태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을 단지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본능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서의 젖가슴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 얽매여 있다. 그러나 그는 엄마 반응들의 중요성에 대하여 새로운 통찰력으로 그것을 통합시키려고 애쓰면서, 16년 뒤에( 1967a) 그는 엄마의 제공에 관하여 좀 더 확실해졌다.: 패러다임은 본능 만족시키기에서 언어이전의 의사소통 그리고 엄마 얼굴 표정들로 옮겨진다. 나는 엄마 얼굴의 거울 역할과 유아의 경험을 위해 반사해 주는 형태들로서의 엄마의 표현을 아기가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아기는 엄마의 얼굴을 반사적인 매개체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웃을 때, 엄마가 반응하며 웃는 모습에서 아기가 보는 것은, 자기 내면상태의 시각적인 형태이다. 위니캇은 여기서 볼라스가 나쁜 경험을 좋은 경험으로 바꿀 수 있는 ‘변형’이라고 표현했던 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의 반응이 어떻게 유아가 이것을 자기 경험으로 붙잡을 지 혹은 사용할 지를 가능하게 해주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있었다. 엄마의 감정적인 반응을 통하여 아기는 이미 있는 자기를 좀더 완전하게 해주는 수단을 습득한다. 위니캇은 이것을 실존적인 용어로:‘나는 보여진다. 그래서 (지금) 나는 존재한다. (1971)

비물질적인 형태로서의 얼굴 표정

위니캇의 초기 작업과 나중 작업 사이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종교에 대한 어떠한 논의에 관하여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정서 발달의 중심에 비물질적인 경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젖가슴 패러다임은 프로이드의 사랑은 젖가슴으로 젖을 먹이는 일로부터 나온다는 그의 본래의 사고방식에 매여 있다. 얼굴 패러다임은- 이것은 엄마의 얼굴을 정서발달의 중심에 두는 것임- 비물질적인 시각적 형태들(이것은 접촉되거나 육체적으로 통합할 수 없는 것)을 주된 요소로 만든다.
전형적인 방식에서, 위니캇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그의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어디에다가 맞출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틀림없이 초기 시각과 평행을 이룬다. 애착 이론과 유아에 대한 조사가 보여주듯이 엄마의 얼굴은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유아의 주의에 중요한 초점을 제공해 준다. 이것은 엄마의 독특한 패턴의 얼굴 형태뿐 아니라 (엄마의 환영과 같은 모습의 초점을 둠-볼라스), 표현력 있는 얼굴 표면, 즉 엄마의 정서 표현들이 연기되어져 나오는 스크린이다. 말이 이해되기 훨씬 전에, 그것은 엄마와 유아사이의 의사소통의 중심이 되며, 위니캇이 묘사한 방식에서 반응적 형태들의 주요 근원이 된다.
P.183
그러므로 엄마의 얼굴이 유아의 느낌에서 특권화된 장소에 자리 잡는 것을 가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나중에, 시각적 동일시로 여겼던 엄마가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이른 시기에, 아마도 엄마의‘환영과 같은 모습’과 마술적인 변형들의 핵심을 조직화하는 일이 일어난다. 만약 볼라스가 제안한 대로‘the sacred(변형적 대상)가 모성적인 것(분리된 대상으로서의 엄마)보다 선행된다’면, 엄마의 얼굴은 틀림없이 the sacred의 중심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이해가 종교와 관련하여 우리를 어디에 두는가? 내 견해로는 이것은 영적인 사랑의 본성에 도착하게 하는 승강장을 제공해 준다. 나는 제안한다, 영적인 사랑은 안나 프로이트가 성욕과는 다른 발달적 계통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를- 이 성욕은 아기에게 젖을 주는 흥분된 일에 일찍 초점이 맞추어진 것– 어떤 것과 연관이 있다고. 이것은 다른 장소, 그리고 다른 축- 엄마와의 초기 결합과 관계되고 이로 인해 안전에 관한 초기 문제와 연관된 유아의 기술의- 에서 시작한다. 이 관점에 따라서 보면, 중심적인 대상은 엄마의 얼굴과 그 표정들이며, 모성적 공감과 이해– 혹은 그 부족– 에 따른 중심적인 활동이 될 것이다. 참으로, 유아가 사람 얼굴에 관계하려는 경향을 이미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아가 반응해주기를 기대하며(얼굴의 거울화) 그것을 찾도록 이끄는 것을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것은 논쟁할 수 있다. 그것이 그렇든지 아니든지, 그러한 반응의 요소는‘형태’와는 거리가 있으며, 얽혀있는 대상이 아니고, 그래서 이것은 비록 초기 단계일지라도 육체적인 그리고 비물질적인(영적인) 노력 사이에 분명한 나누어짐을 표시한다.

담아 주기, 조율, 종교적 탐색

위니캇(1967)은 엄마의 얼굴표정을 유아에게 피지칼하게 존재(existing)보다는 실제를 느끼게 해주는, 존재(being)의 새로운 차원을 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엄마의‘형태들’의 기능을 여러 가지 다른, 그렇지만 연관되어 있는 사항들로 보는 일은 가능하다. 첫째, 그것은 유아의 정서적인 몸짓을‘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유아의 정서적(정신신체적인)인 상태를 잠정적으로 담아주는 것을 제공한다. 셋째, 그것은 그 상태를 객관화 시키는 일과 그것을 가지고 표시해 둘 수 있는 외부적인 형태를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간대상과 같은 엄마의 표정은 초기 상징적인 형태를 구성한다.(언어가 아닌, 상징의)
그러나,얼굴 표정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단지 몇 단어들을 가지고 언어(language)를 말하는 것과 같다.: 미소 짓기와 다른 표현들은 비교적 구체적이지 않고, 나눔이 필요한 더욱 복잡해지는 경험들을 전달하기에는 덜 적합하다. 그러므로, 이‘언어’가 언어(verbal language)가 나타나기 이전 시기에 개발될지, 그리고 어떻게 개발될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복잡성이 너무 증가하는가, 그래서 언어 이전의 경험을 나눌 가능성을 더 풍부하게 해야 하는가? Daniel Stern의 엄마의 조율에 대한 연구가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조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는 바로 이것이다. 엄마가 유아와 계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 동안(Stern은 조율이 9개월쯤에 시작되어 언어 이전 시기까지 계속 된다고 말하고 있다.) 엄마는 직관적으로 반응들을 만들어낸다.
P.184
그 반응들은 엄마가 유아를 방금 경험한 방법인 재연, 혹은 소–공연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반응들은 직관적으로 엄마에 의해서 분별되어진 대로 하는 유아의 자극과 흥분 단계에서 일어나는 시퀀스의 재연들이다.(Stern은 이것들을 생명력 정동(vitality affects)으로 불렀다.) 사실상, 그러한 재연들은 유아의 경험의 특별한 나눔이며, 알아줌이다. 그들은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작은 공연들이며 그래서 직접적으로 모방적이 아닐지라도 그들은 패턴과 리듬을 가지고 꽤 가까이 엄마가 관찰해온 시퀀스를 따라간다. 그것들은 Stern의 언어로 유아의 vitality affects 의 ‘윤곽선들’이다. 그래서 유아에게 그러한 패턴들의 윤곽들과 모양들( profiles and shapes)을 가능(유용)하도록 해 준다. Stern은 조율을‘정동적인 상태를 다시 계산하는 것(1985)’으로 정의했는데, 이 개선은 인지할 수 있도록 개선하는 것, 그러나 본질상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 형태이다. 그래서 엄마의 조율 공연은 유아의 경험의 흐름을 더 큰‘형태들’의 다양성 내에서 얼굴표정 그 자체가 소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특별하게 phrase하고(한 단위로 만들고) punctuate한다(이어준다). 그러나 강조해서 말하자면, 이것의 기능은 유사하다.: 인식과 받아들임, 나눔과 담아주기, 그리고 초기 객관화. 그런 다음 원칙적으로 조율들은 유아에게 미발달적인 언어이전 시기의 형태들을 그 형태를 가지고 담아주고 회상하며 경험을 솜씨 있게 처리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의 풍부함이나 유용성은 엄마의 민감성과 반응들에 따라 다르다.
인간발달의 언어이전 시기는 2년까지 간다. 이 기간 동안 인격의 중요한 여러 면들이 조직화되고, 많은 초기 경험이 유아의 자기 발달 내에서 구조화된다. 그러나 정신분석적인 논의들은 어떻게 그런 구조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투사적 동일시 과정들과 거울 반영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지는 한편, 그것들이 구조화하기를 이루는 실제적인 방법은 그럴듯하게 얼버무려진다. 모성적 담아주기에 대한 Bion의 개념(Bion 1962)이 자주 이 주제에서 논의되어지지만, 자세한 사항들은 알기 어려운 채 남아있다.‘베타 요소들’이 엄마의’알파 기능’(Bion 1965)에 의해 변형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뭔가를 말해주고 있지만, 그것은 정확히 엄마가 무엇을 다시 돌려 주는지, 유아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묘사하지 않고 있다.
위니캇의 얼굴의 거울반영 개념은, 이 문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떻게 내적인 감정 상태가 엄마의 표현인 외적 형태와 연결되는지에 대하여 일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잠정적으로, 그러한 연결들은 유아에게 내면의 느낌을 표시하고 솜씨 있게 다룰 수 있는 첫 손잡이(초기 상징)을 준다. 단순화의 위험성을 안고 말자하면, 누군가가 엄마의 표현은 어떤 내적 상태에게 한 시각적인‘이름’을 제공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고려는 Stern의 조율에 대한 서술을 생각할 때 좀 더 납득하게 해준다. 이 조율에서 엄마의 반응은 유아의 arousal(자극,흥분) 패턴과 유사한 형태와 모양(동일구조의)이다. 적어도 그것은 이론이다. 그러나 의심 없이 엄마의 활동성 역시 유아의 경험을 형성해준다. 왜냐하면 엄마가 자기 아이의 경험을 보는 방법이 당연히 그녀 자신이 만든 것에 의해 억제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민감한 엄마가 진정으로 아기와 접촉할 수 있다고 추측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녀가 되돌려 주는 패턴들이 충분히 동일구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P.185
이 경우에서, 제공된 패턴은 떠오르는(emerging) 경험에 맞추게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반응적인 형태의 리듬(시간에 맞는 패턴)은 유아의 arousal 패턴과 잘 매치되기 때문에 공명(resonance), 고양(enhancement), 담아주기(containment)가 존재할 것이다. 나는 상징적인 유사성에 근거를 둔 형태와 내용 사이의 상상적인 관계를 위해, 담아주기라는 용어를 대충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담아주기와 받아주기 그리고 나누는 것이 모성적 조율의 민감성에 의지한다면, 과정이 실패할 범위가 크다. Stern(1985)은 화냄과 같은 어떤 부정적인 정동을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그는 ‘협박과 해를 주는 감각은 교감(공유)의 개념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도록 두 개의 분리된 경험들 사이의 장벽을 설치한다 ’고 쓰고 있다. 그러면 비록 가장 좋은 경우라 할지라도, 담아주기는 누덕누덕 기운 것과 같고 불완전하여 정서발달을 누락시키도록 이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의 혹은 그녀의‘self’라고 여기는 것이 모성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담겨진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게 보인다.‘담겨 진 자’는 엄마의‘축복’- 제일 처음 엄마의 미소 혹은 조율적인 공연과 같은- 을 받아 왔고,‘담겨진 자’는 엄마를 통해 한 회로(circuit)를 만들었다.– Bion이 보증했을지도 모르는 관점. 이 회로를 통해 이것은‘모양’을 받아들이고 반향하면서 한 형태를 습득한다. 이렇게 해서 ‘담겨진 자’는 엄마의 환경(당연히 경험의 한 측면)에 한해서 한 모성적 형태에 의해 유지된다.– 또는 볼라스가 말한 대로 성스러운(the sacred) 환경 하에서.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담겨지지 않아왔던 것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무엇이 운명이고 그러한 비준되지 않는 물질적인 본성은 무엇인가? 이것이‘담겨지지 않은 것’을 변형되지 않은 beta 요소들의 자리이며, 파편화된 기괴한 대상들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Bion이 관심을 가졌던 질문이다. 현재의 이 틀 안에서‘담겨진다는’것은 모성적 형태 안에 싸여지는 것이다.:‘담겨지지 않는다는’것은 엄마의 현존의 그늘로부터 멀어진, 인식되어지지 않는‘자기의 파편들(selves)’이 limbo(지옥의 변방, 천국과 지옥의 사이)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그래서‘담겨지지 않은’것이 되는 것은 철저하게 배제되는 것이 된다. 게다가 그러한 상속권이 박탈된 selves들은 잘 파편화되며 쓸모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모성적 인식이 없이는 그들은‘이름’도 없고 형태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움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름도 없고, 꼭‘나쁜’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은 되찾아 올 수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도의 불가촉 천민들이 영원히 방황하도록 운명 지어진 것처럼.
지금, 종교는 주로 구원에 대한 탐색이다. 그러나 보통 이해되어지는 것처럼 그것(종교)의 필요는 인간의 죄와 악에 놓여있다. 그리고 죄책감과 악한 감각이 종교를 형성하는 데 대수롭지 않는 요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보스러운 반면, 그것들이 인간의 존재적인 고뇌를 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것들이 내가 초점을 두고 있는 언어이전의 세계에서 전체 대상들 중 오이디푸스적인 세계의 한 가운데 있다 해도 그것들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이 초기의 모성적인 세계에서 중심 이슈는 담아주기이며, 종교적 필요가 이 영역 안에 뿌리를 두는 한, 구원에 대한 탐색은‘발견되어’질 필요성에 의해 이끌어진다. 이 영역의 존재론적인 고뇌에서 죄책감과 죄(guilt and sin)는 아주 작은 부분을 담당한다.
P.186
담아주기의 실패는 내적 고통(malaise)의 ‘원인’이며 받아들임과 인식은 그것의 치료법이다.

Rilke : 변형과 시를 통한 구원

이 개념에 대하여 실제 내용을 주기 위해 나는 오스트리아 시인, Rainer Maria Rilke에 관해 짧게 논의하고자 한다. 그는 지속적으로 존재적인 고뇌(angst)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의 예술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렬히 믿었던 사람이다. 릴케는 이미 유명해진 젊은 시인이었고 돌로미테(알프스산의 산맥)에서 프로이드와 함께 한때 걸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져왔다. 프로이드는 나중에 릴케를‘직면한 삶에 조금 무력한 위대한 시인’이라고 표현했고, 그리고 Lou Andreas-Salome – 릴케가 한때 사랑했던 여인– 는‘그의 뮤즈이고 보호적인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릴케는 좋을 뿐만 아니라 나쁘기도 한‘의미 있는 순간들’의 감정가로서만이 아니라 시적 활동의 본성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나중 시는 시적 과정의‘철학’을 제공했다.
그는 삶의 불확실성과 창조된 것들의 덧없음에 대하여 날카로운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독특한 각각의 창조물들은 살아남을 오직 한 번의 기회밖에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하나만(시)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시는 그것의 독특한 본질에 목소리를 준다. 릴케는 사람이 만든 대상들을 포함하여, 모든 창조물들을 경험했다. 그 창조물들은 벙어리이며 그리고 대변자를 필요로 하는 상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시만이 그것들의 내면에 닿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의 독특함과 진동하는 존재성을 선언할 수 있다. 그래서 각각의 것은 조용히 탄원하며 시로 방향을 돌려 자기를 위해 그(릴케)로 하여금 말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오직 이것만이 창조물들이 완전히‘실제’가 되도록 하는 것이며 이 필요를 실현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말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가…’ 그는 꽤 평범한 대상들의 전체 연속물들을 나열하며 외치고 있다.‘그러나 말하기 위해서, 기억하라/ 오, 사물들이 자신들에게 결코 하지 않았던 대로 그렇게 말하기 위해/ 아주 강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릴케 1960:224)
자, 같은 수준으로, 엄마와 유아와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독특한 존재로서 자기에게 형태를 주며 정확히 표현해 줄 수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한 말 못하는 창조물이 있다. 그리고 위니캇과 스턴에 따르면, 단어들을 갖고 있지 않은 유아가 ‘단지 존재하는 것’보다는‘실제를 느끼기’위해 이것의‘형태들’을 정확히 표현해 줄 엄마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릴케는 엄마와 아기들에 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쩔 수 없이 깊이 연관될 수밖에 없도록 느끼는 어떤 강렬한 활동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어떤 탑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몇 주 동안 계속 글쓰기에 전념할 정도로 무지 많이-. 그는 마치 그의 인생이 시에 의존한 것처럼 시를 썼다.– 그리고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주장했는데(Wright 2000), 예술가는 자주 자기 예술을 통해 초기 모성부족을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릴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릴케가 딸이 되기를 바랬던-그래서 릴케의 두 번째 이름 Maria에 이 사실이 간직되어 있는데- 지독하게 자기애적인 엄마가 있었다. 릴케가 그의 시인의‘말하는 것’을 통해 실제적 존재로 가져오기 위하여 기다리는 말 못하는 창조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깊숙한 단계에서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P.187
이것은 자기 자신의 말하여지지 않은, 반추되지 않은 self이다. 이것은 구원을 위해 조용한 탄원을 하며 엄마인 시( 또한 자기 자신의 부분)에게 방향을 돌린다.
그의 열정적인 사명을 추구하면서 그 시인은 자기 자신의‘말하는 자’가 되며, 자기 자신의 자기-반추이자‘타자’와 조율하는 것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이 담아주는 형태들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서, 충분치 못한 담아주기와 그 결과로 생기는 단지 반만 살아있는 감각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한 수단을 찾고 지배하고 있다.- 이 경우에 시적 언어라는 수단- 그리고 그것을 자기 조절 하에 둔다. 그의 기술들을 통하여 그는 지금 이 수단을 그가 필요한 형태들의 모양을 갖추도록 달래거나 강요하고 있다. 유아시절 그는 엄마의 변덕스러움 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릴케의 경우 고차원적으로 선택한 조율– 그는 지금 자기 자신에게 공명하는 형태들을 공급하는 공급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치료하는 치료자가 되었고 – 또는 누군가가 감히 말할 수 있을, 자기 자신의 구원자가 되었다.
릴케에 관하여 그리고 말 못하는 창조물들의 그의 구원에 관하여 쓰면서, 나는 볼라스가 심미적인 순간들에 대하여 논의한 것처럼, 준-종교의 술어로 이끌리게 되었다. 일부분 이것은 예술적인 형태들과 종교적인 형태들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이 특별한 시인의 열렬한 강도로부터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가 역시 종교적인 필요의 뿌리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만약‘형태들’과‘변형들’을 유아에게 가져다주는 이‘환경 엄마’ 가 ‘신성한 것’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엄마가 유용하지 못할 때 그러한 엄마를 기대하는 일이 구원자에 대한 필요를 창조하는 것인가를 보는 일은 쉽다. 그래서 릴케는 그의 인생과 작품에서 평범한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충동의 원천들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결론과 요약

나는 종교적인 현상과 관계가 있는 어떤 폭넓은 부분들을 보면서 이 장을 시작하였다.: 제도화된 그리고 개인적인 종교, 종교적 삶의 부성과 모성적 요소들, 가부장적인 그리고 모권 중심적인 조직. 나는 유대교와 기독교 내에서 우세한 가부장적 형태들과, 정신분석 협회의 그와 유사한 우세함에 대해 다루었다. 나는 Suttie(1935)를 따랐는데, 종교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이해가 프로이드 자신의 인격과 그 결과로 인한 정신분석적인 설립 둘 다에서 나타난 것처럼 가부장적이고 부성적 편향에 의해 방해 받아왔다고 제안한다.
나는 이 균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종교적 문화에서 모성적인 요소들에 대해 논의하기를 터놓았다. 나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것은 :거울반영과 담아주기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형태들에 대한 개념이고, 또 하나는 '의미 있는 순간'들과 관련된 아이디어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엄마와 유아와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연결시키면서, 종교를 전통적인 정신분석적인 생각에 의해 제공 되어진 것보다 공감적인 측면으로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부성적 편향뿐 아니라 초기의 자기-찾기 형태들(self-seeking forms)로부터 이타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사랑을 보는 구시대적인 관점에 의해 방해 받아왔다. 이러한 것들은 프로이드 생각의 유산이며 그것을 개정하는 일이 기한을 넘겼다. ( 프로이드 생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라는 뜻)
P.188
나는 여러 명의 정신분석학자들과 정신치료자들 특히 써티, 위니캇, 볼비와 볼라스 들의 연구를 논의해왔는데, 그들의 연구는 종교를 인간 발달의 애착/관계적인 축과 연결하는 일을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은 초기 엄마– 그녀의 얼굴과 반응하는 형태들– 를 영적인 갈망의 중심에 두고 있다.:특히 스턴의 경험적 유아에 대한 연구(empirical infant research)는 그러한 갈망이 기원을 두고 있을 구체적이고 상세한 기간을 제공하였다.
종교의 가장 깊은 뿌리는 언어이전의 self의 중심에 놓여있다고 단언하면서 나는 종교에 대한 모든 것이 이러한 용어들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종교적 소망의 중심 요소들이 담아주기와 인식에 대한 필요와 연결되어 있다고 제안한다.: 예술이나 정신치료와 같이 종교가 자기-담아주기 형태들을 제공함으로써 구원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조한다. 릴케의 용어로 엄마의 말인 최초의 담아주기(original containment)가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함은(새로운 시작: Balint 1932) 보편적인 일이다. 종교, 예술, 정신분석 각각은 이 기회를 다르게 제공한다, 다양한 방식들을 통해.

Notes

1. 써티의(1935)‘교제(companionship)에 대한 기초적인 필요’는 준-과학적인 술어이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고 오래된 패션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용어는 Trevarthen(1979)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그는 유아가 단순히 애착대상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원시적-의사소통에 관여할 누군가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2. 이것들은 모성적, 전-오이디푸스적 표현에 관한 생각의 르네상스(부흥)에서 단지 더 중요한 이름들이다.
3. 나는 가장 초기의 엄마-유아와의 관계가 좀 더 넓은 의미로 성적인/에로틱한 요소들의 결핍이라고 제안하지는 않는다.– 확실히 유아는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경험에 몰두한다. 내가 논의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또 확실히 하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애초부터 별개인 실과 실 한 가닥의 공존이다.: 그 하나는 전통적인 의미로 본능적 활동의 흥분된 면들 안에서 어느 정도 갇혀져 있으며 에로틱한 것(예:젖 먹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이 처음부터 관계적이어서 의사소통과 사회적 접촉을 좀 더 하려는 것이다. 미소 짓는 반응은 이 두 번째 축에서 일찍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거울반영과 조율을 필요로 한다.
4. 호프만(1989)은 그녀의 경험과 관련하여‘안다’와‘아는 지식’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그녀는 인지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언어적인 감각 형태들을 통하여 중재된 즉각적으로 감지된 이해를 말한다.
5. 스턴의 감각으로 조율이 너무 늦게 시작된다고 깨닫는 것은 놀랄만한 일일 수 있지만, 이것은 정의(definition)에 관한 문제이다. 스턴에게는 조율이 주관성의 시작과 상호 주관적인 경험의 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다. 풍부한 사회적 주고받기들은 첫 9개월을 거쳐 일어나지만 스턴에 의하면 상호주관적인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주고받기들) 초점은 정동적이라기 보다는 행동적이고 상호적이다(게임들, 모방놀이 등). 조율은 정동적 인지와 가장 처음의(언어이전의) 상징적인 주고받기와 연결되어 있다.
2011-07-13 17:59:58

이름
내용
비밀번호

     
  

관리자로그인~~ 전체 49개 - 현재 1/4 쪽
번호
제목
이름
파일
날짜
조회
49
연구소
첨부화일 : NAAP 교육분석가 및 수퍼바이저.hwp (12800 Bytes)
2018-05-09
23
48
연구소
첨부화일 : 졸업 사례발표, 사례논문 평가 기준표 (뉴욕주 정신분석가 면허 시험 채점 기준).hwp (20992 Bytes)
2018-05-08
17
47
연구소
첨부화일 : 한국정신분석협회 가입 안내서.pdf (322277 Bytes)
2018-05-08
12
46
연구소
첨부화일 : 현대정신분석연구소 교육분석가 명단.hwp (20992 Bytes)
2018-04-26
43
45
연구소
첨부화일 : 현대정신분석연구소 수퍼바이저 명단.hwp (18432 Bytes)
2018-04-26
36
44
연구소
2018-04-02
80
43
연구소
2018-04-02
82
42
연구소
2017-06-28
235
41
연구소
첨부화일 : 1. 학술대회 안내.hwp (18944 Bytes)
2014-09-16
571
40
연구소
첨부화일 : 일차적 홀로 있음.hwp (22016 Bytes)
2013-02-07
1569
39
연구소
첨부화일 : 한국 정신분석전문가협회_정관.pdf (76820 Bytes)
2011-11-29
1230
38
연구소
첨부화일 : 협회입회원서.hwp (22528 Bytes)
2011-11-29
1153
37
최윤숙
첨부화일 : 루빈.hwp (91648 Bytes)
2011-08-24
1753
36
조현희
첨부화일 : 1장 환상을 넘어서.doc (139776 Bytes)
2011-08-24
1464
35
민규선
첨부화일 : 21세기 종교와 무의식 -블랙 3장.hwp (93184 Bytes)
2011-08-24
1356
[맨처음] .. [이전] 1 [2] [3] [4] [다음] .. [마지막]